노순택
장면의 그늘
짧다고 말하기엔 억울할 만한 시간을 들여 나는 분단 관련 사건들을 수집해왔다. 눈길을 끄는 건 물론 간첩사건들이었다. 간첩사건은 그 호칭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지만, 호칭에 얽매이지 않는 일 또한 중요하다. 많은 사건이 ‘간첩사건’이라 발표되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아닌 경우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고식 간첩사건, 상식의 ‘눈깔’을 빼고 ‘공안’의 ‘눈깔’을 박아 넣은 자들이 보통사람을 천인공노할 간첩으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와 같았다. 모래로 쌀을 만들고 낙엽으로 배를 만드는 김일성식 마법을 왜 북에서만 찾는가. 간첩사건의 ‘경과’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야말로 감탄과 멀미의 연속이다.
분단이 싸질러놓은 공안사건, 시국사건은 또 얼마나 많았나. 나는 큰 사건에 주목하는 동시에 작은 사건을 눈여겨본다. 예컨대 화가 신학철을 감옥에 넣었던 ‘모내기 그림사건’(1989)을 주목하는 동시에, 그림 복사본으로 부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체포된 이아무개씨의 경우를 더 눈여겨보는 식이다. 이 얼마나 구차하고 땀띠 나며 멀미 나는 사건들인가.
수집한 사건들의 이름과 날짜와 개요를 달력에 새겨 넣으며 ‘분단인 달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숨 막히는 달력이었다. 십년을 적어 넣는 동안 쌓인 글자의 수만 원고지 천매를 웃돌았다. 구역질 나는 일이다.
물론 나는 사진사로서 분단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시공간을 응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여러 날 서부·중부·동부전선을 오가며 남과 북을 따로 또 같이 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여름, 두만강에서 압록강 끝까지 ‘북의 북쪽’ 경계를 답사할 기회가 생겼다. 중국 땅을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 북한의 ‘로켓맨’은 핵실험을 강행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남북의 경계만큼은 아닐지라도 북-중의 경계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차분하게 자세를 잡고 북한을 응시하며 사진 찍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정의 빠듯함마저 가세하니 북한을 오래 바라보는 건 그저 덜컹대는 버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낙심한 나는 ‘달리는 버스에서 멈춰진 사진을 찍는’ 신기술이 왜 아직도 발명되지 않았는지 원망하다가 포기하는 심정으로 사진기를 들었다. 흔들린 열 중에 안 흔들린 하나도 있겠지 하는 막연한 바람을 품고.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흔들린 사진을 일부러 찍고 있는 나를 보았다. 어쩐지 그런 ‘어려운’ 상황은 평양에 갔을 때 “찍지 말라”는 연속된 경고의 틈 사이에서 언제 사진기를 들어야 할지 고민했던 버스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북한과 마주한 남한의 경계 지역을 오가며 차 안에서 숱하게 들었던 경고의 추억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작 ‘조국의 차 안’에선 흔들린 사진마저 금지되었는데, ‘타국의 차 안’에선 흔들린 사진일지라도 허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우스웠다. 슬펐다. 울렁대는 버스에서 때론 뷰파인더를 보며, 때론 그마저 보지 않으며 느린 셔터를 눌렀다. 멀미가 날 것 같으면 그냥 바라보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일년도 지나지 않아 마치 영화처럼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북-미 정상이 농담을 나누며, 핵실험장이 폐기되는 장면을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일년이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것이 악몽으로 가는 밝은 산책로였다 탄식하게 될지. 이 멀미의 끝을 섣불리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간첩은 누구였을까. 아니, 누가 간첩이 되었을까. 간첩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 일했겠지만, 간첩사건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위해 일했다. 분단체제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말해야 한다면 ‘모순’이 아닐까. 분단은 멀미를 자아낸다. 어디로든 가는 길에서. 사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