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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미야기 요토쿠

등록 2018-07-19 18:02수정 2018-07-20 12:49

미야기 요토쿠를 아는 사람은 향리인 오키나와를 빼고는 일본에도 많지 않다. 그는 미국에서는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1924년의 ‘배일(排日) 이민법’으로 대표되는 미국 이민 노동자들의 수난에 분노하며 사회문제에 눈을 떴고, 1931년 미국 공산당 일본인부에 입당했다. 1933년 10월 명을 받고 몰래 일본으로 돌아가 ‘조르게 기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조르게 기관의 임무는 일본의 대소련전 정책에 관한 정보 수집이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태풍이 한창 몰아치고 있던 시기에 오키나와를 찾았다. 몇 가지 볼일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사키마 미술관에서 ‘일본의 전쟁화’에 관해 강연하는 것이었다. 강한 비바람에도 참석해준 열띤 청중의 호응이 고마웠다.

사키마 미술관에는, 예전에 이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일 여성 미술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들이 소장돼 있다. 또 마루키 이리와 마루키 도시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戰圖)>가 상설 전시돼 있다. 나는 강연 때 일본 전쟁기록화(차라리 ‘전쟁 의지 고양화’라고 해야겠지만)의 대표작인 후지타 쓰구하루의 <사이판 동포, 신절(臣節)을 다하다>에 대해 해설했다. 이 그림은 남태평양의 섬 사이판이 미군의 공격으로 함락됐을 때 당시 그 섬에 거주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신절’(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 바치고 자결했다는 애국 미담을 큰 화면에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은 전쟁 중에 일본 각지를 순회한 ‘성전(聖戰) 미술전’ 등의 제목으로 전시됐고 많은 일본 국민이 몰려들었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는 ‘만세 클리프’라 불리는 단애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여성들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도 ‘신절’을 다하기 위해 자결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그때 사이판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 중에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이는 별로 없다. 일본 식민지였던 남양 제도에는 노무에 동원당한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른바 ‘위안부’들도 있었다. ‘일본인’이라는 ‘국민’의 미담이 날조될 때 이런 주변화된 존재들은 언제나 버림받는다.

오키나와 지상전에서는 많은 현지인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 중에는 일본군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자결’을 강요당한 예도 적지 않다.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은 그들이 듣기 어려운 방언을 쓰는 오키나와 현지인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웠다. 또 좁은 방공호는 군인 우선이어서 현지 주민들은 출구 가까이나 그 바깥으로 쫓겨났다. 아기를 안은 엄마들은 울음소리 때문에 적에게 발각될까봐 아기들을 죽인(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예도 있다. 산지옥이었다. 같은 전쟁, 같은 ‘자결’을 묘사하면서도 마루키 부부의 <오키나와 전도>와 후지타의 작품은 그 방향성이 정반대다. 한쪽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 인접한 사립 사키마 미술관에 있고, 다른 한쪽은 도쿄 중심지 황궁에 인접한 국립근대미술관에 있다.

7월2일 나고시 박물관에 갔다. 거기에 화가 미야기 요토쿠의 작품들이 소장돼 있다. 몇 년 전 그중 한 점이 사키마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어촌에 작은 배가 정박해 있는 풍경화다. 동행한 아내가 화가의 이름이 미야기 요토쿠인 것도 모른 채 “어쩜 이토록 투명한…”이라는 숨막힐 듯한 감탄사와 함께 완전히 그 작품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마침내 바라던 바가 이뤄졌다. 이번에 사키마 미술관장이 애써주고 나고시 박물관이 호의를 베풀어 휴관일임에도 그 작품들을 특별히 관람할 수 있었다.

미야기 요토쿠를 아는 사람은 향리인 오키나와를 빼고는 일본에도 많지 않다. 하물며 한국에서야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03년에 지금의 나고시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폐결핵 때문에 퇴학하고 1919년 16살 때, 먼저 미국에 돈벌이하러 가 있던 아버지의 부름으로 도미했다. 미국에서는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1924년의 ‘배일(排日) 이민법’으로 대표되는 미국 이민 노동자들의 수난에 분노하며 사회문제에 눈을 떴고, 1931년 미국 공산당 일본인부에 입당했다. 1933년 10월 명을 받고 몰래 일본으로 돌아가 ‘조르게 기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조르게 기관’이란 리하르트 조르게가 이끈 첩보조직이다. 조르게는 1895년 러시아의 바쿠에서 태어났다. 독일인 아버지는 석유정제 기사였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조르게는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비밀활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제 전문가요 일류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조르게 기관의 임무는 일본의 대소련전 정책에 관한 정보 수집이었다. 나치스 독일의 위협에 직면한 소련으로서는 극동의 일본이 북진해서 소련을 공격할지, 아니면 남진해서 아시아·태평양 쪽으로 진격할지를 알아내는 것은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이 조르게의 활동에 동지로서 협력한 이가 오자키 호쓰미다. 오자키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중국문제 전문가이며 아그네스 스메들리, 루쉰과도 친교가 있었던 지식인이다. 그는 당시의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브레인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조르게 기관의 활동은 1933년부터 8년여 동안 계속됐고, 그 기간에 귀중한 정보를 모스크바로 빼돌렸다. 1941년 7월2일 어전회의(천황이 참석하는 최고의사결정회의)의 결정을 토대로 한 “일본, 북진하지 않는다”는 조르게 기관의 정보 덕에 소련은 극동의 전력을 대독일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1941년 10월 조르게 기관의 주요 멤버들이 일제히 검거됐다. 첩보기관원으로 17명, 비기관원으로 18명이 검거됐으며, 재판 결과 조르게와 오자키에게는 사형, 크로아티아인 기자 부켈리치, 독일인 무선기사 클라우젠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됐다(부켈리치는 나중에 옥사). 미야기 요토쿠는 취조 중에 수갑을 찬 채 경찰서에서 두 차례나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으나 죽지 못했고, 결국 결핵의 병고가 겹쳐 1943년 8월2일 공판 중에 옥사했다. 그때 40살이었다.

오자키와 조르게는 종전이 가까운 1944년 11월7일 도쿄 구치소에서 잇따라 처형당했다. 오자키의 옥중서간집 <애정은 반짝이는 별과 같이>는 전쟁 뒤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거기에는 아내와 딸에 대한 생각과 함께 동지 조르게에 대한 존경의 염, 몸이 약했던 미야기에 대한 배려 등이 적혀 있다(조르게와 오자키에 대해서는 졸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참조).

전후 오랜 기간 고향에서 ‘국적’(國賊)으로 금기시된 미야기지만 1990년대부터 서서히 재평가 움직임이 나타나, 나고시에서는 2003년에 유지들이 탄생 100년 기념행사도 열었다. 내가 이번에 나고시 박물관에서 입수한 기념책자 <당신들의 시대>에 그 경위가 기록돼 있다. 이 책자에 정리돼 있는 역사연구자 히야네 데루오 류큐대학 교수의 강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런 세계사와 관련된 사건에 왜 이 나고 얀바루(오키나와 북부 산지)라는 작은 지역 출신자들이 뛰어들었던가. 이는 커다란 20세기의 드라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20세기의 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이상을 내걸고(중략) 사람들의 뜻이 좌절당해 간 시대의 빛과 그림자가 펼쳐져 있습니다.”

조르게, 오자키, 미야기 등 이런 활동에 참가한 사람들의 배경이나 생각은 다양하다. 미야기의 경우는 ‘비토(非土)의 비애’가 그 근저에 있다고 히야네 교수는 말한다. ‘비토’란 ‘토착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조어인데, ‘디아스포라’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의 활동은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가능했던 최대한의 반전평화 활동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히야네)

박물관에서 소박한 민예품 등의 전시도 보고 가까운 광장에 있는 미야기 기념비도 본 뒤 귀로에 올랐다. 태풍으로 비바람이 거셌으나 가끔 구름이 갈라진 틈새로 남국의 태양이 빛났다. 난폭해진 바다가 되튕기는 빛은 무시무시하면서도 아름다웠다. 16살의 나이에 이 바다를 넘어 이국으로 건너가 화가가 되고자 했던 청년. 스스로 반전평화 활동에 투신해 고통 끝에 옥사한 청년. 그 생애는 단지 지나간 과거의 것일까.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은 놀라울 정도로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야마토(일본 본토)의 사람들 대다수는 그 일에 무관심하다.

번역 한승동/독서인

<추기>

지난번 칼럼 ‘쓰라린 진실- 영화 박열을 보고’에 대하여 지난 6월1일 박열선생기념회에서 <한겨레> 담당부서로 연락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지는 그 칼럼 일부에서 필자가 박열의 옥중 전향을 확정적인 사실처럼 썼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어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지적에 대해 필자로서 간단하게 언급해 두고자 한다.

필자는 글 속에 명기했듯이, 칼럼의 해당 부분을 신뢰할 만한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 교수의 견해를 근거로 기술했다. 기념회로부터 지적을 당하기 전까지 최근의 논의 전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한 공부 부족을 지적해 준 데에 대해서는 고맙게 받아들인다. 다만, 논의는 아직 진행 중이고, 박열의 ‘전향’이 일제 당국에 의해 날조된 허위정보라는 논증도 충분하진 않은 듯하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야마다 교수 등의 종래 설들이 완전히 부정됐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지난 칼럼에서 필자가 박열의 전향을 “사실”이라고 쓴 부분은 “전향한 것으로 보도됐다”고 쓰는 것이 더 정확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향후 연구의 진전을 지켜봤으면 한다.

다만, 필자의 의도는 “바닥없는 늪”과 같은 천황제의 기능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것, 그것이 지금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지금은 “설마 이 사람이”하고 생각할만한 사람들까지 전향의 뜻을 표명하고 친일로 전락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 현상이 왜 생기는가. 그것을 인간성의 심연까지 가 닿는 시선으로 응시하며 고찰해야 한다. 설사 “고통스런 진실”일지라도 그것을 직시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논지다. 거듭 얘기하지만, 영화 <박열>은 잘 만든 작품이었으나 이 ‘전향’문제에 대한 시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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