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이름을 짓는 일은 매우 자의적인 행동 같지만 사실 명명자의 마음속 이념이나 가치관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 여자아이의 이름을 ‘예쁜이’라고 지으면서 그저 예뻐서 그렇게 지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성의 삶에서 미모가 우선적이라는 가치 지향의 태도가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남자아이 이름에 용감할 용(勇)자를 넣는 것도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인명이나 지명만이 아니다. 공공의 목적이나 가치중립적인 활동을 지향하는 조직의 명칭도 은연중에 일정한 이념적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 어느 지방의 지방자치 조직에는 ‘새마을과’라는 부서도 있었다. 곧 없앤다니 다행이다. 한때 대학에 ‘학도호국단’이란 어용 학생조직이 당연하다는 듯 모든 학생들을 단원으로 삼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검찰청에서도 서슬 퍼렇던 ‘공안’이라는 부서가 사라진다고 한다. 사실 공공의 안전이라는 그 낱말 뜻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횡포가 그 이름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온 것이다. 유혈이 낭자하던 프랑스혁명 시기의 ‘공안위원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이름으로 나라의 안전을 구실 삼아 사람들의 천부적 권리에 상처를 많이 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안적 시각’이란 말은 수구적이고 냉전적인 안보중심적 시각이라는 의미나 다름없이 사용되었다. 과거를 반성하고 이름을 뜯어고치는 것을 말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으로 또 마찬가지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 모두에게 허무감만 남길 것이다. ‘보안사’를 ‘기무사’로 바꿨는데 이름만 바꿨지 알맹이는 그대로가 아닌가? 껍데기만 바꾸는 일이 지속된다면 이름을 바꿀 때마다 오히려 그 이름에 대한, 또 언어에 대한 신뢰만 그만큼 떨어질 뿐이다. 지속가능한 이름은 지속가능한 실천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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