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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순택, 장면의 그늘] 개미가 쓰러졌다 베짱이가 노래한다

등록 2018-07-05 18:06수정 2018-07-05 19:33

가난? 모름지기 예술은 가난 속에서 꽃피며, 좋아서 하는 일엔 감수해야 할 일이 따른다는 비웃음 섞인 찬사는 얼마나 근사한가. 노동과 예술을 대하는 고질적인 편견은 오늘날 흐려졌다지만, 여전히 짙다. 숱한 개미들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쓰러졌다.
노순택
사진사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를 천민자본주의 어린이 교과서라고 손가락질한다면, 나의 편협함은 거꾸로 손가락질받을지 모른다. 공동체와 지도자의 안녕을 위해, 축적이라는 반박할 수 없는 미덕을 향해 군말 없이 땀 흘리는 개미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오래도록 요구해온 ‘바람직한 근로자상’과 닮았다.

개미가 추구해야만 하는 고귀한 실천은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3대 정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왜 ‘희생’이라는 단어는 감췄을까. 주저했을 것이다. 희생은 안드로메다에서 불릴 때 숭고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호명될 땐 화약이 될 수 있으니까.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정면화하지 말고 측면화해야 하는 것이니까.

베짱이는 놀고먹었다. 개미가 희생을 감수하며 근면하게 자조하고 협동할 때, 그 녀석은 무얼 했나. 한마디로 빌어먹었다. 남들이 일할 때 노래했다. 쓸모라곤 없는 짓이었다. 베짱이는 우리 사회가 오래도록 조롱해온 ‘게으른 광대’, 흔한 말로 ‘딴따라’를 은유한다. 딴따라는 혼자서도 잘 논다. 문제는 (베짱이의) 부추김이다. 문제는 (개미의) 부화뇌동이다.

세뇌된 근면에 금이 가고, 절제와 순응의 질서에 의심의 춤사위가 날아든다면 이는 퇴폐와 불온이 아닌가. 하지만 덜 위험했다. 혁명가라면 즉각 추방하고 검거해야 하되, 딴따라는 지켜보며 조롱하는 걸로 충분했다. 가난? 모름지기 예술은 가난 속에서 꽃피며, 좋아서 하는 일엔 감수해야 할 일이 따른다는 비웃음 섞인 찬사는 얼마나 근사한가. 노동과 예술을 대하는 고질적인 편견은 오늘날 흐려졌다지만, 여전히 짙다.

숱한 개미들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쓰러졌다. 개미의 주검 앞에서 그 죽음이 죽임은 아닌지 묻는 개미가 하나둘 늘어났다. 순종의 대가와 삶을 갈아 넣어 쌓아올린 ‘부의 가치’가 결국 누구의 몫이 되고 마는지, 그것이 정당한 일인지 의심하고 항의하고 투쟁하는 개미가 어느 순간 파도처럼 너울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6월 항쟁의 장면들은 지금 봐도 거대하다. 다시 봐도 치열하다. 그때 베짱이들은 무얼 했나. “개미 베짱이 구분이 어딨어. 그땐 다 같은 벌레들이었지. 비록 하는 게 노래 부르고, 시 끼적이고, 그림 그리고, 춤추는 베짱이 짓이었을지라도 우리 또한 개미라는 신념이 확고했지.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가 현장의 베짱이에겐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이른바 변혁운동이 민주주의를 향해 온몸 내던지며 달려가던 그 시절의 딴따라들, 점잖게 말해 현장예술은 가난할지언정 행복했어.” 중년의 베짱이 얼굴이 환해졌다가 곧 어두워진다.

“우리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연대하고 투쟁하며 ‘동지’라 불렸지만, 실은 늘 주변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해. 현장예술을 오래 하기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떠나고 마는 이유가 뭘까. 한마디로 말할 순 없을 거야. 확실한 건 있지. 이 짓으로 삶을 유지하기란, 활동을 재생산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거. 나야 버린 몸이니 이대로 갈지라도, 후배들에게 함께하자는 말을 꺼내기란 실로 어렵다는 거. 언젠가부터 우리는 딱딱한 투쟁 현장의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녹여주고, 값싸게 쓸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소중하지만 말로만 소중한 사람들. 운동의 추임새, 도구가 되어버린 존재가 바로 현장의 딴따라들이 아닐까. 너무 심한 자기비하인가.” 누군가 덧붙인다. “현장예술이 값싼 예술, 질 떨어지는 예술처럼 안팎에서 취급되는 까닭은 우리에게도 있겠지.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냉엄한 과제를 풀지 못했잖아.”

좋아서 하는 일엔 감수해야 할 고통이 따른다는 충고는 고요하고 엄숙하다. 이 말로부터 예외적인 광대가 있을까. 하나 그것이 이솝우화가 속삭이는 교훈, 어느새 내면화한 지적질이라면 나는 슬프게 웃을 수밖에 없다.

예술에 현장이 따로 있고 비현장이 따로 있는가. 그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신음하는 곳, 누군가 쓰러지는 곳, 간신히 몸을 일으켜 힘겹게 싸우는 그곳을 자신이 쓰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려야 할 ‘현장’이라 여기며 버텨온 이들이 있다. 남들이 일할 때 노래하는 자, 남들이 싸울 때 노래하는 자에게도 삶은 있다. 황현이 아프다. 김호철만 곁에 있어야 하는가.

▶ 관련 기사 : “운명에 무릎 안 꿇어”…김호철-윤민석의 슬픈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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