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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그것이 정말 ‘보수’였을까? / 오항녕

등록 2018-06-21 18:11수정 2018-06-22 08:59

오항녕
전주대 교수·역사학

무너진 보수, 보수의 궤멸, 몰락…. 6·13 지방선거 및 보궐선거 결과를 놓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이다. 동시에 ‘뼈를 깎는 노력’, ‘진정한 성찰’ 따위의 식상한 수식어까지 가세한다. 보수 정당은 새로운 가치와 노선을 정립하는 게 시급하다는 충고까지 이어진다.

정말 뼈를 깎는 노력과 성찰을 하면 ‘이번에 참패한 보수’가 거듭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부정적이다 못해, ‘이런 보수’는 절대 거듭나서는 안 된다고 직감한다. 나아가 그동안 보수라는 탈을 쓰고 자행된 혹세무민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통상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을 보수-진보라고 부른다. 나도 다른 마땅한 말이 없어 가끔 쓴 적이 있다. 그동안 보수-진보라는 용어를 계속 써도 되는지 의문을 품은 사람이 과연 나 혼자뿐이었을까?

우선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볼 때 보수-진보는 정치 지형이나 세력을 설명하는 데 매우 편협하고 허술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역사의 전개를 선(Line) 모양으로 이해하면서 생겨났다. 마치 줄을 서서 따라가듯 역사가 발전한다는 관념이다. 선진국, 후진국이라는 말처럼. 진보관념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설득력을 얻었다. 그랬다가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즘, 냉전의 경험은 진보가 역사에서 보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얼마든지 퇴보, 타락할 수 있다.

보수-진보는 현실에 대한 태도이다.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방점을 둔다. 개혁, 혁신, 창조 등으로 대변된다. 반면 보수는 인간과 사회의 어떤 가치와 성과를 지키는 태도를 말한다. 상식, 양심, 전통, 의무 등이 그 가치를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이번에 몰락한 보수가 이들 가치나 태도에 걸맞은 존재들이었을까? 대한민국 70년의 역사에서 보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분단이 낳은 적대성은 보수-진보라는 말도 오염시켰다. 전쟁을 들먹이는 공포와 협박의 정치는 공론의 위축과 성원 간의 대립을 양산할 뿐이다. 그 결과는 파시즘적 자기검열만 남는다.

독일에서는 초등학생들도 배우는 노동쟁의라는 상식이, 이 땅에서는 극좌, 종북의 책동이 되는 데도 우리는 무감각하지 않았는가? 미국, 프랑스에서 매겨지는 고율의 보유세가 이 나라에서는 여전히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매도당하지 않는가? 아무리 봐도 보수 정당인 민주당을 이 나라에서는 진보 정당으로 보지 않는가?

정통성 있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친일 청산을 테러로 방해해도, 멋대로 헌법을 바꾸거나 권력을 찬탈해도, 국가정보원이 간첩사건을 조작해도, 전시작전통제권조차 딴 나라에 맡기자며 대낮에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어도, 공영방송 앞에서 가스통을 놓고 행패를 부려도, 멀쩡한 강을 뒤집을 돈은 있어도 아이들 밥 그냥 줄 예산은 없다고 버텨도, 국정농단이라는 말도 모자라는 사태가 터져 대통령이 탄핵되어도, 마지막 냉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려고 노심초사할 때 그걸 쇼라고 빈정거려도 다 ‘보수’라는 이름으로 가려버렸다.

부패-무능-독재-전쟁 세력이 보수의 탈을 쓰고 행세하게 두면, 그때는 보수도 진보도 사라질 수 있다. 더 이상 ‘이번에 사라진, 보수의 탈을 쓴 위선’을 안타까워하지 말자. 할 줄도 모르는 성찰을 촉구하지도 말고, 깎을 뼈도 없는데 자꾸 깎으라고 요구하지도 말자. 그 시간에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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