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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순택, 장면의 그늘] 속는 셈 치고 너희를 믿을 때

등록 2018-06-07 17:58수정 2018-06-07 19:16

끝까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싸웠던 이들만이 협상 끝에 집단이주했다. 그때 농부들이 간절하게 원했고 정부가 확답했던 게 ‘대추리’라는 이름이었다. 이름만큼은 빼앗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12년이 흘렀다. 폭삭 늙은 농부들이 청와대 앞에서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원망하며 눈물을 쏟는다.
노순택
사진사

‘약속’이란 낱말에선, 숭고의 냄새가 난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지키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그 뒤에 숨쉬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까. 약속은 무겁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아니라 네 기다림의 무게 때문에. 약속은 무섭다. 내가 잊어도 너는 잊지 않을 수 있기에.

물론 세상에는 오만가지 약속이 있고, 이를 둘러싼 십만가지 경우가 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 분통 터지는 정치가 있는가 하면, 지킬까봐 겁나는 정치가 있듯이.

10여년 전, 평택 대추리를 오가며 작업하던 나는 어쩌다 마을 주민들 초상 찍는 일을 떠맡게 됐다. 들녘에서 일하던 개똥이 할배를 슬쩍 찍고, 머리띠를 두른 채 미군기지 철조망 앞에서 악쓰는 소똥이 할매 얼굴에 사진기를 들이대던 짓과는 사뭇 다른 일이었다. 쉽지 않았다. 그것은 아흔을 바라보는 조선례 할머니의 서리 맺힌 이야기를 듣는 일이자, 방승률 할아버지의 얼굴을 찍다가 무심코 당신의 잘린 손가락을 바라보는 일이었으며, 들에서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아이가 수로에 빠져 죽은 줄도 몰랐다는 한승철 형님 부부의 맺힌 한을 짐작하는 일이기도 했다.

알게 된 약을 먹은 탓인지, 알게 된 병을 얻은 탓인지, 초상난 마을에서 초상 사진을 찍은 업보였는지 ‘오가던’ 대추리는 어느새 ‘내가 사는’ 대추리가 되었다. 정부의 협박과 이간질 속에 늘어가는 빈집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지킴이’란 이름으로 기꺼이 마을 주민이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저녁마다 대추분교 운동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질긴 놈이 이긴다! 올해도 농사짓자!” 외쳤던 기억을 누구인들 잊을 수 있을까.

대추리 농민들은 1943년 일본군에게 고향을 빼앗겼다. 제국주의 군대는 그 자리에 활주로와 시설 부대를 짓고 침략과 수탈의 기지로 삼았다. 1945년 해방으로 고향을 되찾았지만, 얼마 뒤 전쟁이 터졌다. 1952년 겨울, “공산주의 마수로부터 그대들을 지켜주러” 미군이 들이닥쳤다. 일본군 기반시설이 있던 그곳은 쓸모가 있었다. 그렇게 들어온 ‘캠프 험프리스’는 전쟁이 끝나고도 떠나지 않았고, 농부들은 철조망 옆에 다닥다닥 집을 짓고 가깝고도 먼 고향을 바라보며 반세기를 견뎌왔다. 그랬던 그들에게 한·미 두 정부는 자기들끼리 약속을 맺고 용산 사령부와 미2사단 이전 작업에 땅이 더 필요하다며 “떠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아무러면 노무현 정부가 명령을 했겠는가,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숱한 설득과 타협을 거쳤다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2006년 5월4일,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진압작전 아래 하늘과 땅을 에워쌌던 헬리콥터와 포클레인, 방패와 진압봉을 들고 새까맣게 밀려들던 군인과 경찰과 용역깡패는 없던 일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다시 말할지 모른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들었어야지.”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은 피눈물 흘리며 그 땅을 떠났다. 4년의 질긴 싸움은 오순도순 정답던 마을공동체를 회복하기 힘들 만큼 파괴했다. 늙은 농부들을 상대로 정부가 내지른 ‘속삭임과 으름장과 이간질’의 언어를 어떻게 적어야 할까.

끝까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싸웠던 이들만이 협상 끝에 집단이주했다. 그때 농부들이 간절하게 원했고 정부가 확답했던 게 ‘대추리’라는 이름이었다. 이름만큼은 빼앗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주지에 대추리라는 이름을 쓰라는 거였다. 농부들은 의심했다. 절박함은 의심을 부른다. 누군가들은 뭐라고 안심시켰던가. 속는 셈 치고 믿어보세요, 정부의 약속을 믿어야지 누구를 믿습니까!

12년이 흘렀다. 폭삭 늙은 농부들이 청와대 앞에서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원망하며 눈물을 쏟는다. 묻자, 속는 셈 치고 너희를 믿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너희는 말하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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