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그 포스터에 광분한 이유

등록 2018-06-07 17:58수정 2018-06-08 09:10

반감의 기저에 도사린 핵심은 결국 권위주의 아닐까. 이를테면 이런 것. “공손히 한 표 달라 해도 줄까 말까인데, 어디 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감히 되바라지게!” 그 멘탈리티는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온 ‘정치인 머슴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박권일
사회비평가

“1920년대 이른바 계몽주의 모더니즘 여성 삘이 나는 아주 더러운 사진을 본다. 개시건방진.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다. 그만하자. 니들하고는.”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씨 포스터를 두고 변호사 박훈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글을 보는 순간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 격렬한 반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 박훈 변호사는 진보 성향 인사로 알려졌기에 더 의아했다. 그는 나중에 ‘사과문’을 올렸지만 내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나도”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반감을 드러낸 사람은 박 변호사만이 아니었다.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는 서울 시내 곳곳에서, 특히 강남에서 숱하게 찢겨나갔다. 무엇이 그들의 ‘버튼’을 눌렀을까? 저 집단적 반감의 심층에 도사린 멘탈리티는 무엇일까?

가장 쉬운 대답은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문구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일단 손사래 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벽보를 찢은 사람들 중 일부는 정말로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싫어 그런 짓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박훈 같은 이의 반응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페미니즘의 대의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건방”지다고 했다. 요컨대 그는 텍스트로 된 메시지, 공약 따위에 반응한 것이 아니다. 포스터 속 후보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벽보를 훼손한 사람 일부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지 모른다. 이제 논의는 도상학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신지예 후보 사진, 한눈에도 평범하진 않다.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을 연출하려 발버둥 치는 여타 후보들과 전혀 다르다. 쇼트커트 머리에 단정한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몸은 정면을 향한다기보다 옆을 향했다. 고개를 틀어 정면 쪽으로 돌렸지만 글자 그대로 살짝 틀었을 뿐이라서,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친구를 흘깃 보는 느낌이다. 웃고 있으나 해사한 웃음이라기보다 자신만만한 미소에 가깝다. 여성 후보 사진의 경우 안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신 후보는 사각 형상의 금속테 안경을 썼다.

박 변호사가 말한 “1920년대 이른바 계몽주의 모더니즘 여성 삘”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짐작하건대 소위 ‘모단걸’(毛斷girl, modern girl)을 가리킨 게 아닐까 싶다. 머리를 짧게 자른, 현대적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했던 여성들. 그러고 보니 100년 전 경성의 신여성들이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아주 더러운 사진”이란 소릴 들어야 할 이유라도 되는가?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포스터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포스터

반감의 기저에 도사린 핵심은 결국 권위주의 아닐까. 이를테면 이런 것. “공손히 한 표 달라 해도 줄까 말까인데, 어디 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감히 되바라지게!” 그 멘탈리티는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온 ‘정치인 머슴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정치인은 머슴이다’라는 말이 종종 국민 주권론처럼 포장되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장 동떨어진 사고방식이다. ‘정치인 머슴론’은 후보의 배우자가 목욕탕에서 유권자들 때 밀어주는 일을 아름다운 미담으로 만들고, ‘적어도 선거 기간에는 유권자가 왕’이라는 식의 왜곡된 보상심리의 원천이 되었다.

‘정치인 머슴론’은 평등한 참여의 장이어야 할 정치를 엘리트의 희생과 보답 서사로 환원하고, 결국은 갑질과 냉소의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정치인은 머슴이나 노예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정치인은 시민의 대표이지만 어디까지나 동등한 시민으로서 그러한 것이다. 신지예 후보의 사진을 “시건방”으로 봐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신 후보가 청년·여성 후보이니 더 관대하게 봐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서울시장에게 기대되는 역량이나 미덕을 신 후보가 지니고 있는지 여부는 따로 따져볼 문제이며, 후보와 정당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만약 후보의 정책이나 행보에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질문할 수 있다. 비판하고 싶다면 논점 제대로 잡아 비판하면 된다. 단, 동료 시민으로서의 존중을 담아서. 주관적 인상에 근거해 정치인을 폄하하는 습속은 우리 정치담론을 캐릭터 품평으로 납작하게 짜부라뜨려왔다.

지금 신지예 후보를 향한 쏟아지는 말과 행동 상당수는 그저 폭력이고 갑질일 뿐이다. 서로 시민적 예의를 지키자. 그 태도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서부지법 폭동 군중의 증오는 만들어진 것이다 [박현 칼럼] 1.

서부지법 폭동 군중의 증오는 만들어진 것이다 [박현 칼럼]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2.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사설] 김용현 궤변 속 계엄 찬성했다는 국무위원 밝혀내야 3.

[사설] 김용현 궤변 속 계엄 찬성했다는 국무위원 밝혀내야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4.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5.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