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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인권보다 표? / 오윤주

등록 2018-04-24 18:09수정 2018-04-24 19:02

오윤주
충청강원팀 기자

충청은 느리지 않다.

충북 증평군의회가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폐지했다. 충남도의회에 이어 두 번째다. 증평은 1읍·1면에 인구 3만7000명 남짓한 작은 자치단체다. 군의원은 7명이다. 이들 군의원은 지난해 10월20일 인권조례를 만들었다. 여당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나머지 여야 의원 6명은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모든 의원이 조례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당연히 조례는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꼭 6개월 만인 지난 20일 이 조례는 폐지됐다. 소수의 인권 보장을 위해 다수를 역차별할 수 있다는 여론이 있고, 또 주민 간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게 폐지 이유다. 조례 폐지는 6개월 전 대표발의한 의원과 의장 등 여당 의원 2명을 뺀 나머지 의원 5명이 속한 기획행정위원회가 폐지를 결정한 뒤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전격적이었다.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고, 의장은 방망이를 두드렸다. 자신들이 만든 6개월짜리 조례를 없애는 데엔 1초도 채 안 걸렸다. 본회의장 출입을 거부당한 충북인권연대 회원들은 인권조례 폐지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유리문 너머 인권조례 폐지 현장을 똑똑히 바라봤다. 조례 폐지 뒤 몇몇 의원들은 방청석을 차지한 기독교단체 관계자 등과 악수를 하며 웃기도 했다.

증평 인권조례는 지역 기독교단체의 문제제기로 폐지가 추진됐다. 조례가 성소수자의 인권을 대변하면서 동성애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증평지역 한 교회 부목사는 “성경에선 동성애를 막고 있는데 법적 조례 때문에 교회가 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인권은 소중하지만 이 조항은 잘못됐다”고 했다.

조례를 봤다. 증평 인권조례는 19조로 이뤄졌다. 7쪽 분량의 조례는 목적, 정의, 군수의 책무, 인권 보장 및 증진위원회 설치, 인권교육, 인권 보장·증진 정책을 위한 조처 등이 전부다. 어디에도 ‘성소수자’, ‘동성애’ 관련 문구는 없다.

충남도의회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은 인권조례의 성소수자 보호 조항이 동성애를 옹호·조장한다는 주장을 들어 폐지했다. 충남 인권조례 폐지는 이미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 성소수자 특별보고관은 충남 인권조례 폐지 결정에 항의하는 편지를 최근 외교부에 보냈다. 충남도는 인권조례 폐지가 헌법 등에서 규정한 자치단체의 인권 보장 의무 규정을 위반한다며 충남도의회를 상대로 대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충남, 증평에 이어 공주, 부여, 계룡 등에서도 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이 있다. 왜 유독 충청일까? 인권연대 ‘숨’ 이은규 일꾼은 “이 지역 기독교계의 조직적 움직임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 표현했다.

인권조례 폐지 이슈는 6·13 지방선거로 옮겨갈 태세다. 충북인권연대는 증평 인권조례 폐지를 두고 기독교단체 보수표에 의원들이 굴복한 것이라고 했다. 작은 땅 증평에서 눈에 보이는 표 때문에 자신들이 잉태한 조례를 자신들 손으로 묻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증평군에 조례 폐지 재의를 요구한 데 이어, 폐지에 나선 의원들의 낙천 운동에 나섰다.

충남 선거판에도 인권조례 이슈가 부각했다. 이인제 자유한국당 후보가 “동성애를 공식화·제도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조례 폐지 통과는 잘된 일”이라고 하자, 양승조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인권조례는 동성애를 허용하자는 게 아니라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자는 것”이라고 각을 세웠다. 선거 때마다 느린 말보다 빠른 행동으로 전국의 표심을 가늠했던 충청 유권자들은 유독 충청지역 곳곳에서 일어나는 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을 어떻게 볼까?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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