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북한으로 들어간 윤이상은 강서대묘 벽화를 직접 보았다. 윤이상의 음악이 각각의 부분은 그것 자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이유는, 아시아적 음악이면서 유럽적 음악인 이유는 그의 음악적 세계관이 강서대묘 벽화의 세계관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베를린 가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던 윤이상의 유해가 지난 2월25일 고향 통영으로 옮겨졌다. 베를린에서 눈을 감은 지 23년 만이었다. 유해는 ‘2018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일인 3월30일 오후 2시 고인의 소망대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파도 소리 들리는’ 통영국제음악당 뒷마당에 안장된다. 생전에 윤이상은 “음악적 명성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언젠가는 통영으로 돌아가 바다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마음으로 음악을 들으며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통영을 그리워한 것은 삶과 음악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소설가 루이제 린저는 “윤이상의 음악이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인간의 고귀한 차원과 어두운 충동이 생겨나는 지하의 차원, 영원한 조화의 세계인 천상의 차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후기 4중주곡들과 모차르트의 4중주와 5중주곡들에 깃든 심원하고 영원한 질서의 아름다움을 윤이상의 음악에서 경험한다”고 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을 영원성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겸손의 표현일 수도 있고, 영원성의 덧없음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절대를 갈망했다. “저의 첼로협주곡에서 종지부로 향해 치닫는 옥타브의 도약을 생각해보세요. 이 도약은 자유와 순수를 수렴하는 절대로의 갈망을 의미합니다. 절대의 영역을 표현하는 고음은 두 개의 트럼펫이 맡습니다. 첼로가 거기에 이르고자 하지만 불가능하지요.” 윤이상이 가장 좋아하는 악기가 첼로다. 그에게 첼로는 인간을 표상한다. 그는 첼로협주곡을 통해 ‘인간이란 불가능한 꿈을 꾸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윤이상에게 꿈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 미묘한 생명체이다. 1967년 6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독일에서 서울로 불법 납치되어 사형선고까지 받고 감옥에 유폐된 그가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페라 <나비의 꿈>을 작곡하면서 자신을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속 ‘나비’로 변신시켰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삶과 음악의 세계관을 집약하는 상징이 고구려 고분 벽화 강서대묘 사신도이다. 벽화에 그려진 상상의 동물은 네 개의 방위를 나타내는 청룡과 백호, 주작과 현무인데, 이 네 마리 동물들은 개별적 생명체이면서 동시에 한 생명체다. 부분이 전체이며 전체가 부분인 것이다. 그가 벽화의 복제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은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1959년), <바라>(1960년), <교향악적 전경>(1960년) 등이다. 1963년 북한으로 들어간 윤이상은 강서대묘 벽화를 직접 보았다. 1500여년 동안 깊은 땅속에 보존된 벽화에서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색의 깊이, 조화와 긴장이 완벽하게 결합된 구조와 형식에 압도적으로 사로잡혔다. 윤이상의 음악이 각각의 부분은 그것 자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이유는, 아시아적 음악이면서 유럽적 음악인 이유는 그의 음악적 세계관이 강서대묘 벽화의 세계관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현실이 꿈이며 꿈이 현실인 이유는, 고향(조국)이 남한이면서 북한이며 독일인 이유는 그의 삶이 그의 음악적 세계관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출현하여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인면조와 반인반수의 동물들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바탕으로 한 이미지이며, 개막을 알리는 평화의 종이 울리자 다섯 아이들을 축제의 마당으로 이끈 동물이 강서대묘 벽화의 백호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윤이상의 세계관과 평창올림픽 정신의 만남이 역사의 필연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1987년 7월 윤이상이 남북한 정부에 민족합동음악축전 개최를 제안한 것은 남과 북이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라는 세계관의 표현이자 실천이었다. 윤이상의 제안은 3년 후 결실을 맺어 1990년 10월 평양에서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열렸다. 그해 12월에는 평양 대표단 33명이 참여한 ‘서울송년음악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사이 윤이상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조금만 걸어도 탈진했다. 그의 오랜 소망인 통영 귀향이 1994년으로 들어서면서 마침내 이루어질 듯했다. 그해 9월 ‘윤이상 음악제’를 앞두고 귀향이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돌연 향후 북한에 가지 말 것, 과거의 정치 행적을 반성할 것 등의 약속을 요구했다. 윤이상에게 삶과 음악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라는 폭력적 요구였다. 통영 귀향은 윤이상의 마지막 삶의 끈이었다. 그 끈이 끊어지자 그의 삶도 끊어졌다. 윤이상이 숨을 거둔 것은 1995년 11월3일이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