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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순택, 장면의 그늘] 지나치게 주체적인 농담

등록 2018-02-08 18:20수정 2018-02-08 19:19

저 ‘위대한 것’이 지금, 내 앞에서 잡담하는 남녘 남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꽁초와 키재기를 하고 있었다. 곧게 선 두 기둥의 머리에서 붉은 불이 타올랐다. 사진기를 꺼냈다.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 기묘한 관계를 부여해 사진으로 박아내는 건 내가 즐겨 온 농담이다.
노순택
사진사

13년 전 가을, 어쩌다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대동강가에 자리 잡은 옥류관이란 음식점에서 냉면을 먹었다.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달고 일정을 안내하던 초로의 북녘 남자는 식탁에 앉자마자 “평양냉면은 너무 맛이 없다”며 투덜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침을 튀기며 찬양하던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뜻밖의 불평에 깜짝 놀라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우리 평양냉면은 너무 맛이 없어서 세 그릇밖에 먹지 못합네다. 맛이 없어도 많이들 드시라요.”

‘안내라는 이름의 꼼꼼하고 지나친 감시’로 짜증을 자아내던 그의 썰렁한 농담 하나에 식탁에 온기가 돌았다. 냉면으로 배를 채운 이들은 대동강이 훤히 보이는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사소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금연을 결심했던 나는 끽연자들의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강 건너 또 하나의 담배꽁초에서 불이 타오르는 걸 발견했다. 주체사상탑이었다. 북조선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단 한 순간도 꺼져서는 안 되는 ‘혁명의 불꽃’이었다. 모두 잠든 깊은 새벽, 전력난을 겪던 평양이 어둠에 휩싸인 순간에도 홀로 도도하게 빛나던 탑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반드시 꺼뜨리고 부숴버려야 할 횃불이자 괴물이기도 했다.

저 ‘위대한 것’이 지금, 내 앞에서 잡담하는 남녘 남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꽁초와 키재기를 하고 있었다. 곧게 선 두 기둥의 머리에서 붉은 불이 타올랐다. 무엇이 더 간절한 불일까. 사진기를 꺼냈다.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 기묘한 관계를 부여해 사진으로 박아내는 건 내가 즐겨 온 농담이다. 하나 이 농담이 북녘에선 결코 통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나의 문장과 하나의 이미지가 농담이 될 때와 금기가 될 때,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

갈라진 채 흐른 70여년은 농담을 건넬 수 없는 세월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고 분단권력의 지휘자들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깊게 베인 상처를 사랑으로 꿰맸다가 증오로 헤집기를 지겹도록 반복한 결과 분단도 굳어지고 권력도 굳어지는 효과를 맛봤다.

예나 지금이나 남북의 권력은 분단이 낭만이길 원한다. 증오와 사랑으로 뒤엉킨 낭만의 대서사시. 낭만으로 (부드러워진 게 아니라) 굳어진 분단체제는 다스리기 수월하다. 농담은 가벼운 것이지만 내버려둘수록 위험하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류와 김일성류가 가장 열심히 한 일 가운데 하나가 농담의 금지였다. 국가안전기획부와 국가안전보위부는 이름만 닮은 게 아니라 하는 짓이 같았다. 너희는 분단이 작동한다고 믿어야지, 오작동한다고 의심해선 결코 안 되느니라!

30년이 더 흐르면 우리는 농담 없는 100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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