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가 오래 살았던 이슬라네그라의 집터를 찾아간 리틴이 거기서 본 것은 새 세대가 끊임없이 그곳을 찾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곳을 찾은 젊은 연인들은 집 울타리에 낙서를 남기고 간다. 그중에 하나는 이렇다.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 장군이여, 아옌데와 네루다는 살아 있다. 1분의 어둠이 우리를 눈멀게 할 순 없다.”
도쿄경제대 교수 이번엔 파블로 네루다에 대해 써 볼 작정인데, 아무래도 그 전에 짧게나마 언급해둬야 할 게 있다. 지난해 12월16일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92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95년을 사셨다. 16살 때부터 7년간 중국 대륙의 일본군 위안소를 전전하며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1993년에 일본 거주 피해자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생존자 증인으로 싸웠으나 2003년 최고재판소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나는 ‘어머니를 모욕하지 마라’(일본에서 1998년에 처음 발표)라는 글에서 송 할머니 얘기를 했다. 그 졸문에서 나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은) “돈을 받으려고 떠들어대는 것이라 매도하는 자가 있고, 그런 야비한 매도에 고개를 끄덕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세상인가”라고 썼다. 20년 뒤인 오늘 그 매도는 일본에서 점점 더 야비해지고 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송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명복을 빈다는 따위의 얘기를 할 기분이 내게는 도무지 생기지 않는다. 다만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나 자신을 탓하며 사죄드리고, 야비한 세력에 맞서 최후까지 저항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수밖에 없다. 이 ‘세력’에는 거짓 ‘화해’를 얘기하고 ‘12·28 한-일 합의’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송 할머니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얘기할 기회를 따로 만들기로 하고 여기서는 네루다 얘기를 하고자 한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에 걸쳐 여느 때보다 많은 영화를 봤는데, 그중 한 편 <네루다, 위대한 사랑의 도망자>(Neruda, 2016년)가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의 이런 시대상황에서 얘기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블로 네루다는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두말할 필요 없는 유명인이지만 젊은 세대에겐 그렇지 못하다. 더구나 그가 활약한 시대의 한국은 군사정권기였기 때문에, 이건 내 추측이지만, ‘빨갱이’ 시인 네루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단지 ‘빨갱이’로만 알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루다는 칠레의 시인이고 외교관이었다. 1904년에 태어나 1973년 군부 쿠데타 와중에 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네루다는 외교관으로 부임한 스페인에서 프랑코파 파시스트의 쿠데타와 내전을 직접 지켜봤다. 1945년에 칠레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입당한 공산당이 1948년에 비합법화됐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그리고 다시 파리로 국외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그 시기의 도망자 네루다와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경찰관 펠루쇼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칠레 변경의 한적한 마을과 눈 덮인 안데스산맥 영상 묘사가 정말 아름답다. 칠레의 진보세력은 1960년대 말 친미 반공 과두지배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인민연합’ 전략을 수립했고, 공산당은 대통령 예비후보로 네루다를 지명했다. 그러나 네루다는 사회당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통일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사퇴했다. 1970년 선거에서 아옌데가 당선돼 인민연합정권이 탄생했다. 네루다는 아옌데 정권의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됐고, 재임 때인 197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옌데 정권이 지향한 것은 복수정당제를 유지하면서 구리광산 등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농지개혁의 철저한 추진으로 사회주의화를 달성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이라 칭했다. 이 ‘길’은 당시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지지한 아름다운 꿈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 아래 우파의 정권전복 공작이 격화하고, 1973년 9월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다. 대통령 관저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아옌데는 전사했다. ‘좌익 사냥’의 폭풍 속에 축구경기장이 임시 정치범수용소로 바뀌고 수많은 시민들이 연행돼 고문을 당했다. 수만명이 칠레를 빠져나가 망명했다. 쿠데타 직후, 네루다는 피노체트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기 위해 멕시코로 망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자택에서 군인들에게 연행당한 뒤 지병인 전립선암이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2011년 그의 운전사와 개인비서로 일했던 인물이 네루다가 숨지기 전 가슴에 수상한 주사를 맞았다고 주장해 독살 의혹이 불거졌고 2016년 4월에는 그의 유체를 무덤에서 파내 독살 흔적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독살이라 단정할 만한 근거는 찾지 못했으나 여전히 의혹은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네루다의 매력은 그 ‘정치적 올바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영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풍만한 여인이여 육(肉)의 사과여 달의 불이여/ 짙은 해초 내음이여 빛에 단련된 진흙이여/ 어떤 어스름한 밝은 세상이 그 원주 사이에 열려 있는가/ 어떤 고대의 밤이 남자의 오감을 황홀하게 만드는가’(<백편의 사랑의 소네트> 중 ‘풍만한 여인이여’) 얼마나 거리낌없고 관능적인 노래인가. 지금도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쿠데타 뒤 멕시코로 망명한 영화감독 미겔 리틴은 1985년 계엄령하의 칠레에 잠입해 다큐멘터리 영화 <계엄령하의 칠레 잠입기>(1986년)를 제작했다. 네루다가 오래 살았던 이슬라네그라의 집터를 찾아간 리틴이 거기서 본 것은 새 세대가 끊임없이 그곳을 찾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곳을 찾은 젊은 연인들은 집 울타리에 낙서를 남기고 간다. 그중에 하나는 이렇다.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 장군이여, 아옌데와 네루다는 살아 있다. 1분의 어둠이 우리를 눈멀게 할 순 없다.” 이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네루다의 시가 칠레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시의 위대한 힘을. 이 영화의 뛰어난 발상은, 네루다를 추적하는 경관의 말 속에 네루다의 시가 풍성하게 인용되고, 그것을 통해 경관 자신의 복잡한 내면이 묘사되며, 결국 그가 자신의 표적이었던 시인에게 매료당해 간다는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네루다는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인물이 아니며 영웅도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변덕쟁이에 제멋대로 구는 향락주의자다. 하지만 그 정의를 향한 사랑, 민중에 대한 공감, 무엇보다도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지와 유머가 보는 이들에게 상쾌한 인상을 준다. 네루다의 두번째 아내인 델리아의 매력도 유감없이 표현돼 있다. 그녀 덕에 네루다는 지역 주민들과 친해지고 피카소와의 친교도 돈독해진다. 이는 대서양을 사이에 둔 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진보적인 사람들의 문화권이 매우 풍요롭고 광범위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 한 가지 감탄했던 것은 이 영화의 감독 파블로 라라인이 1976년 칠레 산티아고 태생이라는 점이다. 쿠데타 3년 뒤다. 앞서 얘기한 리틴 감독이 망명세대라면 라라인은 쿠데타 이후 세대다. 그런 신세대가 신선하고 자유로운 감각을 마음껏 구사하면서, 동시에 역사를 굳건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장난기 많은 시인이 저세상에서 살아 돌아와 “꼴 좋다. 나는 살아 있다구!” 하며 파시스트들을 향해 혀를 날름 내밀고 있는 것 같다. 칠레에서 이런 격렬한 투쟁과 비극이 진행되던 시기에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도 그와 닮은꼴의 현실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나도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범 석방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간 캐나다의 지방도시에서 칠레 망명자 가족이라는 소녀를 만난 적이 있다. 나와 소녀는 말이 통하지 않아 얘기다운 얘기도 나눌 수 없었으나 금방 서로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했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칠레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네루다라는 존재 또한 우리 것이기도 하다. 번역 한승동/독서인
연재서경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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