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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 세상의 저녁] 문재인 정부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

등록 2017-12-28 18:15수정 2017-12-28 19:11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까지 1700만 시민들이 든 촛불이 평화롭게 출렁거릴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노래가 만장처럼 펄럭였던 5월광주와 1987년 민주항쟁에서 흘러나온 역사의 영혼들이 촛불의 바다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시민혁명이 일으킨 기적의 주체는 역사의 영혼들이었다.
정찬
소설가

2017년이 저문다. 촛불시민혁명과 박근혜 탄핵 파면,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적폐 청산 등 올해 우리가 겪은 정치적 격랑은 드라마틱했다. 정치적 격랑의 주체는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까지 촛불광장을 지킨 1700만 시민이었다. 촛불시민혁명이 세계를 놀라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와 함께 세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가운데 국민이 원하지 않은 정부를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무너뜨렸다는 데에 있다.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촛불시민에게 ‘2017년 인권상'을 수여한 것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12월25일 성탄 메시지에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한 것은 촛불시민혁명이 캄캄해져가는 세계의 하늘에 진실의 불꽃, 희망의 불꽃을 쏘아 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의 힘은 스스로의 시간을 창조하여 영혼을 정화하는 데에 있다. 촛불시민들의 영혼은 진실이 창조한 시간에 정화되어 ‘역사의 영혼’이 되었다. 어떤 영혼도 혼자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어떤 영혼도 혼자인 적이 없다. 이 영혼의 이중성이 하나로 겹칠 때, 그러니까 ‘나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이 될 때 그 영혼은 ‘역사의 영혼’으로 변화한다. 시민들의 영혼이 역사의 영혼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겨울을 환하게 밝힌 촛불광장에서였다.

역사의 영혼은 권력의 영혼과 근원적으로 다르다. 서로 다른 그 생명체들은 마주 달리는 기차의 모습과 흡사하다. 역사의 변혁은 두 생명체의 충돌을 통해 일어난다. 촛불광장에서의 평화로운 혁명은 기적이었다. 이 기적을 누가 일으켰을까?

산 자의 영혼만이 역사의 영혼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자의 영혼도 역사의 영혼으로 변화한다. 어떤 죽음도 혼자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어떤 죽음도 혼자인 적이 없다. 이 죽음의 이중성이 하나로 겹칠 때, ‘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때 그 죽음은 역사의 영혼으로 변화한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에서 1960년 4·19혁명을 거쳐 1980년 ‘5월광주’와 함께 80년대 민주항쟁의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죽음들이 역사의 영혼이 되었다.

5월광주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는 군부세력의 오래된 생각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었다. 광주시민들의 죽음에 이르는 저항이 5공 정권의 비민주적 본질을 세계인들에게 여지없이 드러냄으로써 정권의 도덕적 토대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라는 국민적 궐기에 직면했던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동원하지 못한 것은 광주의 기억 때문이었다. 5월광주는 6월 민주항쟁이 이룩한 ‘87년 체제’의 모태였다.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까지 1700만 시민들이 든 촛불이 평화롭게 출렁거릴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노래가 만장처럼 펄럭였던 5월광주와 1987년 민주항쟁에서 흘러나온 역사의 영혼들이 촛불의 바다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시민혁명이 일으킨 기적의 주체는 역사의 영혼들이었다.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역사적 책무가 엄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게 나라냐’라는 겨울광장의 외침에는 공정한 사회, 양심과 원칙이 존중받는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 응축되어 있다. 1700만 시민을 겨울광장으로 끌어들인 원동력은 그리움과 열망의 밀도와 깊이였다. 한국 사회에서 양심과 정의와 원칙을 지키는 시민들이 오히려 박해를 받아온 것은 해방 이후 적폐 청산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죄악을 오늘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죄악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는 카뮈의 말은 한국 현대사를 적확하게 관통한다. 이 관통의 모습, 그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모멸감과 슬픔, 모멸감과 슬픔의 못에 박혀 깊고 어두운 골짜기에 매달려 있는 역사의 육신. 촛불시민혁명은 고통스러운 역사의 육신을 다시 비추고 있다.

적폐 세력들은 못에 박힌 역사의 육신을 견디지 못한다.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진실은 그들의 안온한 존재의 집을 헤집는 흉기와 같다. 그들이 진실을 끊임없이 은폐하고 훼손하고 왜곡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된 현재만을 비추는 뒤틀린 역사의 거울이다. 뒤틀린 역사의 거울에 갇혀 적폐 청산을 무산시키려는 그들의 집요하고 강고한 정치·경제·사회의 권력 카르텔을 문재인 정부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못에 박혀 깊고 어두운 골짜기에 매달려 있는 역사의 육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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