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기획자 <내 마음이 지옥일 때>란 책을 낸 적이 있다. 제목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부정적 느낌에 대한 우려가 으뜸이었다. 그런 제목의 책을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라는 걱정도 있었다. 결과는 반대였다. 제목만 보고 눈물이 핑 돌아 책을 집었다는 사람까지 있다. 내 마음이 딱 그랬다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을 아는구나 싶어서 뭉클했다는 것이다. 공감의 핵심기제가 그렇다. 마음을 알아주면 된다. 공감은 쌀도 만들고 달콤한 잠도 보장하고 화산 같은 분노도 가라앉힌다. 단지 쌀과 집이 없어서 헬조선이 되는 게 아니다. 이 땅엔 진짜 공감을 경험하지 못해서 지옥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널렸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에서도 그렇다. 문제는 마음을 알아준다는 걸 계몽, 훈계, 설득, 물질적 지원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착각을 방지하기 위한 몇 가지 팁. 옳은 말 하지 말기. 나이 들수록 더. 가까운 사람이 영화를 개봉했다. 기껏 초대했더니 난도질 수준으로 입찬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내용, 편집, 배우 캐스팅이 잘못됐다고 입에 침을 튀긴다. 영화는 이미 개봉했고 고칠 수도 없다. 전문평론가도 아니면서 왜 그러나. 필요한 얘기가 아니라 자기감정 배설이다. 그림 전시회에 온 변호사 동창이 물감 색깔까지 지적하는 걸 보고 정나미가 똑 떨어졌다는 어느 화가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비판하는 지점들을, 만드는 이들은 이미 고민했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인데 혼자만 탁견을 가진 양 자기감정에 취해 오래 공들인 이들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는다. 도움이 된다고 믿어서다. 본인을 포함해 독설 듣고 잘되는 사람은 없다. 옳은 말 하지 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은, 무너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내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하는 것은 옳은 말이 아니라 다정한 응원이다. 부메랑이 존재한다는 걸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건희 정도를 제외하면 대개의 사람은 상대적인 존재다. 갑인 동시에 어디서는 을이고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다. 부당한 걸 못 참는 성격이란 알량한 정의감을 앞세워 누군가를 식인물고기처럼 물어뜯으면서도 나와 내 가족은 그런 대상에서 예외일 거라는 믿음은 지진이 나도 우리 가족은 안전할 거라는 생각만큼 비합리적이다.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아파트 2층과 1층에 사는 사람의 층간소음에 대한 견해나 대처는 완전히 다르다. 평생 1층에 살거나 평생 2층에 사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결국 부메랑을 맞는다. 부메랑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만 알아도 식인물고기 같은 지옥은 줄어든다. 걸핏하면 누군가에게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는 말을 날리는 사람이 있다. 멀리해야 한다. 그게 부모라도 그렇다. 어떤 경우엔 관계의 셔터 자체를 내리는 게 답이다. 나다운 걸 왜 네가 정하나. 자기 편하자고 나를 ‘너답게’라는 올가미 속에 가두는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너답지 않게’라는 말은 하면 안 된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이도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공감의 끝은 개별적 존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집중의 끝은 지금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주는 것이다. 눈물 흘리는 사람이나 벼락처럼 넘어진 사람에게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봐주는 것만으로 웬만한 지옥은 사라진다. 그게 공감의 힘이다. ‘사람그물’만 7년 썼다. 많이 배웠고 성장했다. 독자의 자리에서 경험하려고 퇴장한다. 좋은 시절이 가까워지고 있다 느낀다. 모두 평안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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