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 다수는 과거의 국체 이데올로기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재생산하면서 자신들이 쌓아올린 보이지 않는 분단의 벽 안에 틀어박혀 타자에 대한 멸시와 증오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비합리성이야말로 전쟁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다. 지금 우리가 <국체의 본의>를 읽어야 할 이유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의 기자 아미라 하스가 일본을 찾아왔다. 그녀 자신은 유대계 이스라엘 국민이지만 장기간 팔레스타인 쪽의 도시 라말라에 살면서 그곳 주민들의 일상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의 부당한 점령을 비판하는 논진을 펼쳐왔다. 대표적인 저서로 <가자에서 목마르다>(Drinking the Sea at Gaza), <라말라 보고>(Reporting from Ramallah, 일본어판 제목은 ‘팔레스타인에서 보고합니다’, 지쿠마쇼보, 2005)가 있다. 이번에 일본에 온 그녀는 오키나와, 히로시마, 교토, 후쿠시마 등을 돌아보고 도쿄대 등에서 강연했다. 나와 대담도 했는데, 자세히 소개할 순 없지만, 그녀와 얘기하면서 내가 생각한 것을 적어보려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분단의 고정화로 극우화하는 세계”라는 것이 되겠다. 세계는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우경화했는데, 지금은 더 나아가 극우화 단계에 들어섰다. 하스에 따르면, 1993년의 ‘오슬로 합의’ 이후 이른바 ‘평화 프로세스’와 함께 오히려 이스라엘의 부당한 점령이 확대되고 기정사실화해 피점령지 주민은 일상적인 불공정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오슬로 합의에 조인한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종교 우파의 손에 암살당했다. 점령지는 견고한 분리벽에 둘러싸여 주민은 왕래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벽을 경계로 이스라엘 쪽과 팔레스타인 쪽의 분단이 고정화하고 상대 이미지의 ‘악마화’가 진행됐는데, 그 때문에 유대계 이스라엘 사람인 하스는 벽 너머에 있는 점령지에 살면서 그곳 주민들과 어울리고 그곳의 현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을 계속 전하고 있다. 그런 ‘분단’은 세계 도처에서 심각해지고 있고,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분단’은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조선민족의 인간적 해방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요인이다. 해방 뒤 우리는 6·25전쟁까지 경험했으나 전쟁 상태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민주화된 1990년대 이후 남북 대화와 교류 기운이 고양된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북 대립 상태가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에서 탄생한 트럼프 정권은 멕시코와의 국경에 ‘벽’을 세우자고 외치면서 이민 배척을 주장해 권력을 잡았다. 유럽에서도 이민 배척 움직임은 영국, 프랑스는 물론 독일도 흔들어대고 있다. 타자에 대한 편견과 불관용의 벽은 전세계에서 점점 높아지고 두꺼워져 가고 있다. 10일 공시된 일본의 총선거는 바로 일본 민주주의의 종언과 극우정권의 탄생을 고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아베 신조 총리는 자신의 처와 친구가 깊이 관여한 비리의혹 사건으로 신뢰에 금이 가자 그 위기에서 도피하기 위해 ‘국난’을 외치며 무모한 국회 해산으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이에 편승해 대두한 것은 ‘희망의 당’이라는 이름의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며, 민진당이라는 종래의 ‘리버럴 정당’은 맥없이 스스로 무너졌다. 자민당도 희망의 당도 모두 국민의 배외주의적 심정을 더욱 부채질해서 지지를 얻으려 하고 있다. 또 그런 선동을 지지하는 층이 일부 극우세력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 중에도 다수 존재한다. 아베의 대항세력인 것처럼 거론되는 희망의 당 대표 고이케 유리코는 예전부터 핵무장론자이며 뿌리부터 배외주의자다. 도쿄도지사인 그는 전임 마스조에 요이치 지사가 약속한 도쿄 한국학원 부지 제공을 철회했다. 간토(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이제까지 도쿄도지사들은 형식적으로나마 위령제에 추도문을 보냈으나 고이케는 이번에 그것을 보내지 않았다.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희망의 당과 자민당의 극우 대연립정권 탄생까지 예상된다. ‘리버럴’로 불리는 세력이 일본에서 소멸하고 있다. 겨우 옛 민진당의 일부가 ‘입헌민주당’을 창건해 저항하고 있으나 의석의 다수를 점할 정도로 약진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나는 제1차 아베 정권 시절이던 2006년 <한겨레>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베 정권의 탄생은 곧 동아시아에 강력한 극우정권이 수립됐다는 걸 의미한다. 그것은 세계평화 그 자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그 예상이 적중한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한 사회가 전체주의로 전락해 가는 현장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왜 이럴까? 피침략 민족들은 물론, 연합국 국민이나 자국민도 미증유의 희생을 강요당한 결과, 손에 쥐었던 ‘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은 결국 일본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철저히, 더욱 깊숙이 ‘일본’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때마침 <국체의 본의> 한국어판(<국체의 본의를 읽다>, 어문학사)이 출판됐다. <국체의 본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문부성이 발행한 ‘초국가주의’ 문서다. 1935년 문부성 사상국의 주도하에 제국대학 교수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대표적 학자 14명으로 편찬위원회가 조직돼 1937년에 발행했다. ‘국체’란 한마디로 얘기하면 “일본은 천황의 나라다”라는 이데올로기다. 그 점을 분명히 하고 그에 투철한 국민정신을 창출하는 것이 그 책의 편찬 목적이었다. <국체의 본의> 전문이 이번에 처음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우리 조선민족 전체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문헌이기에 당연히 이미 번역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보편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신내림(接神)”의 비합리성이 관철되고 있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국체의 본의>에 의한 국체 정의의 최종 근거는 신화”이며, “모든 것은 신화에 대한 ‘신념’ 위에 구축된 언설”이다. 조선민족의 ‘단군신화’처럼 세계의 대다수 민족에겐 창세신화, 건국신화가 있다. 그러나 그들 신화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글자 그대로 신화로서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상례인데, 그것이 그대로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더구나 타민족에게까지 강요되는 경우는 드물다. 예외를 찾자면 구약성서 신화를 사실이라 강변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압박하는 이스라엘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국체의 본의>는 ‘한국 병합’ 등 주변 민족들 침략을 천황의 고마운 마음의 발로이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중대한 세계사적 사명”이라고 얘기한다. 게다가 터무니없게도 조선민족은 거기에 감사하도록 강요당했다.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도록 요구받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간주될 경우에는 “민도가 낮다”며 멸시당하거나 가차없는 폭력에 시달렸다. ‘국체’란 한국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말인데, 그 내용을 알게 되면 눈을 돌리고 싶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독자들이 이 읽기 괴로운 문헌을 읽어야 할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모든 조선민족의 삶에 지우기 어려운 각인을 새겼고, 유형무형의 왜곡을 남겼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깊이 알아야만 한다. 둘째로,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은 그런 이데올로기와 결별할 호기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연합군 쪽의 점령정책도 거기에 가세해 천황제는 온존됐다. 전쟁 책임 추궁은 불철저하게 끝났다. 전후 대체로 20년간은 일본에서 그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사람들이 일정한 세력을 점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쇠퇴했다. 일본 국민 다수는 과거의 국체 이데올로기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재생산하면서 자신들이 쌓아올린 보이지 않는 분단의 벽 안에 틀어박혀 타자에 대한 멸시와 증오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비합리성이야말로 전쟁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다. 지금 우리가 <국체의 본의>를 읽고 국체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단지 조선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도 포함한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도쿄경제대 교수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의 기자 아미라 하스가 일본을 찾아왔다. 그녀 자신은 유대계 이스라엘 국민이지만 장기간 팔레스타인 쪽의 도시 라말라에 살면서 그곳 주민들의 일상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의 부당한 점령을 비판하는 논진을 펼쳐왔다. 대표적인 저서로 <가자에서 목마르다>(Drinking the Sea at Gaza), <라말라 보고>(Reporting from Ramallah, 일본어판 제목은 ‘팔레스타인에서 보고합니다’, 지쿠마쇼보, 2005)가 있다. 이번에 일본에 온 그녀는 오키나와, 히로시마, 교토, 후쿠시마 등을 돌아보고 도쿄대 등에서 강연했다. 나와 대담도 했는데, 자세히 소개할 순 없지만, 그녀와 얘기하면서 내가 생각한 것을 적어보려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분단의 고정화로 극우화하는 세계”라는 것이 되겠다. 세계는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우경화했는데, 지금은 더 나아가 극우화 단계에 들어섰다. 하스에 따르면, 1993년의 ‘오슬로 합의’ 이후 이른바 ‘평화 프로세스’와 함께 오히려 이스라엘의 부당한 점령이 확대되고 기정사실화해 피점령지 주민은 일상적인 불공정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오슬로 합의에 조인한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종교 우파의 손에 암살당했다. 점령지는 견고한 분리벽에 둘러싸여 주민은 왕래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벽을 경계로 이스라엘 쪽과 팔레스타인 쪽의 분단이 고정화하고 상대 이미지의 ‘악마화’가 진행됐는데, 그 때문에 유대계 이스라엘 사람인 하스는 벽 너머에 있는 점령지에 살면서 그곳 주민들과 어울리고 그곳의 현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을 계속 전하고 있다. 그런 ‘분단’은 세계 도처에서 심각해지고 있고,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분단’은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조선민족의 인간적 해방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요인이다. 해방 뒤 우리는 6·25전쟁까지 경험했으나 전쟁 상태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민주화된 1990년대 이후 남북 대화와 교류 기운이 고양된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북 대립 상태가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에서 탄생한 트럼프 정권은 멕시코와의 국경에 ‘벽’을 세우자고 외치면서 이민 배척을 주장해 권력을 잡았다. 유럽에서도 이민 배척 움직임은 영국, 프랑스는 물론 독일도 흔들어대고 있다. 타자에 대한 편견과 불관용의 벽은 전세계에서 점점 높아지고 두꺼워져 가고 있다. 10일 공시된 일본의 총선거는 바로 일본 민주주의의 종언과 극우정권의 탄생을 고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아베 신조 총리는 자신의 처와 친구가 깊이 관여한 비리의혹 사건으로 신뢰에 금이 가자 그 위기에서 도피하기 위해 ‘국난’을 외치며 무모한 국회 해산으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이에 편승해 대두한 것은 ‘희망의 당’이라는 이름의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며, 민진당이라는 종래의 ‘리버럴 정당’은 맥없이 스스로 무너졌다. 자민당도 희망의 당도 모두 국민의 배외주의적 심정을 더욱 부채질해서 지지를 얻으려 하고 있다. 또 그런 선동을 지지하는 층이 일부 극우세력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 중에도 다수 존재한다. 아베의 대항세력인 것처럼 거론되는 희망의 당 대표 고이케 유리코는 예전부터 핵무장론자이며 뿌리부터 배외주의자다. 도쿄도지사인 그는 전임 마스조에 요이치 지사가 약속한 도쿄 한국학원 부지 제공을 철회했다. 간토(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이제까지 도쿄도지사들은 형식적으로나마 위령제에 추도문을 보냈으나 고이케는 이번에 그것을 보내지 않았다.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희망의 당과 자민당의 극우 대연립정권 탄생까지 예상된다. ‘리버럴’로 불리는 세력이 일본에서 소멸하고 있다. 겨우 옛 민진당의 일부가 ‘입헌민주당’을 창건해 저항하고 있으나 의석의 다수를 점할 정도로 약진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나는 제1차 아베 정권 시절이던 2006년 <한겨레>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베 정권의 탄생은 곧 동아시아에 강력한 극우정권이 수립됐다는 걸 의미한다. 그것은 세계평화 그 자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그 예상이 적중한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한 사회가 전체주의로 전락해 가는 현장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왜 이럴까? 피침략 민족들은 물론, 연합국 국민이나 자국민도 미증유의 희생을 강요당한 결과, 손에 쥐었던 ‘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은 결국 일본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철저히, 더욱 깊숙이 ‘일본’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때마침 <국체의 본의> 한국어판(<국체의 본의를 읽다>, 어문학사)이 출판됐다. <국체의 본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문부성이 발행한 ‘초국가주의’ 문서다. 1935년 문부성 사상국의 주도하에 제국대학 교수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대표적 학자 14명으로 편찬위원회가 조직돼 1937년에 발행했다. ‘국체’란 한마디로 얘기하면 “일본은 천황의 나라다”라는 이데올로기다. 그 점을 분명히 하고 그에 투철한 국민정신을 창출하는 것이 그 책의 편찬 목적이었다. <국체의 본의> 전문이 이번에 처음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우리 조선민족 전체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문헌이기에 당연히 이미 번역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보편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신내림(接神)”의 비합리성이 관철되고 있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해설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국체의 본의>에 의한 국체 정의의 최종 근거는 신화”이며, “모든 것은 신화에 대한 ‘신념’ 위에 구축된 언설”이다. 조선민족의 ‘단군신화’처럼 세계의 대다수 민족에겐 창세신화, 건국신화가 있다. 그러나 그들 신화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글자 그대로 신화로서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상례인데, 그것이 그대로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더구나 타민족에게까지 강요되는 경우는 드물다. 예외를 찾자면 구약성서 신화를 사실이라 강변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압박하는 이스라엘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국체의 본의>는 ‘한국 병합’ 등 주변 민족들 침략을 천황의 고마운 마음의 발로이며, 일본이라는 나라의 “중대한 세계사적 사명”이라고 얘기한다. 게다가 터무니없게도 조선민족은 거기에 감사하도록 강요당했다.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도록 요구받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간주될 경우에는 “민도가 낮다”며 멸시당하거나 가차없는 폭력에 시달렸다. ‘국체’란 한국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말인데, 그 내용을 알게 되면 눈을 돌리고 싶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독자들이 이 읽기 괴로운 문헌을 읽어야 할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모든 조선민족의 삶에 지우기 어려운 각인을 새겼고, 유형무형의 왜곡을 남겼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깊이 알아야만 한다. 둘째로,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은 그런 이데올로기와 결별할 호기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연합군 쪽의 점령정책도 거기에 가세해 천황제는 온존됐다. 전쟁 책임 추궁은 불철저하게 끝났다. 전후 대체로 20년간은 일본에서 그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사람들이 일정한 세력을 점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쇠퇴했다. 일본 국민 다수는 과거의 국체 이데올로기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재생산하면서 자신들이 쌓아올린 보이지 않는 분단의 벽 안에 틀어박혀 타자에 대한 멸시와 증오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비합리성이야말로 전쟁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다. 지금 우리가 <국체의 본의>를 읽고 국체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단지 조선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도 포함한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연재서경식 칼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