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의 혁명 이론은 체가 ‘새로운 인간’이라 표현한 용어에 압축되어 있다. ‘새로운 인간’은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희생을 통해 도덕적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의 출발점은 프로이트였다. 체는 자신의 <철학 노트>에 ‘사랑이 깨어나는 곳에 어두운 폭군인 자아가 죽는다’라는 프로이트의 문장을 적었다.
소설가 볼리비아 밀림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체 게바라가 미 중앙정보국(CIA) 지휘의 볼리비아군에 체포되어 처형된 것은 1967년 10월9일이었다. 체의 죽음은 미국이 가장 원했지만, 소련도 반겼다. 쿠바는 체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62년 이후 혁명의 중심지가 되어 제3세계 전역에 퍼진 무장혁명 근거지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체의 궁극적인 꿈은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거대한 대륙혁명이었다.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과 대립을 피하려는 소련의 입장에서 미국의 텃밭인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까지 혁명을 부채질하는 체의 존재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체가 처음 소련을 방문한 것은 1960년 가을이었다. 체의 가슴이 설렘으로 가득 찬 것은 사회주의의 모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레믈(크렘린) 권력층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목격하면서 환멸이 설렘을 덮었다. 체가 사회주의자로 변화한 것은 20대 시절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을 목격하면서였다. 체에게 사회주의는 인간의 의식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사상이며 운동이었다. 의식의 혁명적 변화가 없는 이들이 소련의 당 엘리트 계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르크스와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적 인간의 높은 도덕성이 권력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후 두차례 소련 방문과 크레믈 권력층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주의 모국이 부패의 늪에 빠진 관료들과 권력에 취한 늙은 정치가들의 놀이터로 변해버렸음을 확인했다. 체가 크레믈을 ‘돼지우리’로 부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소련이 잘못된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간 이유를 체는 소련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자본주의적 경쟁체제를 일부 도입한 레닌의 신경제 정책에서 찾았다. 경쟁체제 속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진정한 사회주의적 인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체의 생각이었다. 체에게 자본주의는 인류의 타락과 고통의 근원이었다. 체는 소련과 소비에트 블록이 자본주의로 나아갈 운명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에 남겼다. 체는 라틴아메리카 혁명국가들이 형제애를 바탕으로 사회를 이루어 자원을 공유하면 소련과는 다른 올바른 사회주의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권력을 버리고 지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중심인 볼리비아의 밀림으로 들어간 것이다. 체의 혁명 이론은 체가 ‘새로운 인간’이라 표현한 용어에 압축되어 있다. ‘새로운 인간’은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희생을 통해 도덕적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의 출발점은 프로이트였다. 체는 자신의 <철학 노트>에 ‘사랑이 깨어나는 곳에 어두운 폭군인 자아가 죽는다’라는 프로이트의 문장을 적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저작들에 대한 체의 연구가 심화되고 있을 때였다. 체가 ‘자아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은 게릴라 전쟁에서였다. 게릴라들은 혁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체에게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으로 비쳤고, 쿠바 혁명 이후 ‘새로운 인간’이라는 용어로 나타난 것이다. 1989~1991년의 소비에트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이 자본이라는 절대권력에 종속되어버린 세계, 인간의 정신이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물질화되는 세계, 한 사람의 부를 위해 아흔아홉 명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세계, 가난과 폭력의 희생자를 사물로 바꿔버리는 기괴한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 이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말라버리는 것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다. 여기에서 체의 ‘새로운 인간’이 빛을 발한다. 자기희생으로 타인의 고통과 세상의 악을 끊을 수 있다고 믿는 투명한 정신의 소유자가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체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세계는 인류의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문제는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는 데에 있다. 인간의 윤리적 허약함 때문이었다. 유토피아의 세계를 견디기에 인간은 윤리적으로 너무나 허약한 존재였다. 이 압도적인 절망 앞에서 인류는 늘 무릎 꿇었다. 지금도 무릎 꿇고 있다. 허기진 ‘식인종적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생명의 무차별적 파괴와 참혹한 불공정의 고통과 허물어진 윤리의 잿더미 속에서. 체는 무릎 꿇지 않았다. 꼿꼿이 서서 스스로 ‘새로운 인간’이 되어 역류하는 역사의 물결을 헤치고 꿈을 향해 나아갔다. 체가 전세계 ‘청년’들에게 영원한 별이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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