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기르는 사람에게 ‘아들’과 ‘딸’처럼 가슴 시린 단어는 없을 것이다. 애정을 퍼부었는데도 실망을 안겨 주거나, 제대로 챙기고 품어 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의젓하게 자라버리는 게 아들과 딸이 아닌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이 무겁디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아들’과 ‘딸’은 아마 가장 따스하고 늘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깃든 말이라 하고 싶다.
이런 아들과 딸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혹독하고 저렴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근간의 몇몇 사건을 접하면서 또 한번 절감하게 된다. 우리의 딸들은 밖에 나가서 ‘딸같이 생각해 준다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추행을 당한다. 아들들도 자신들을 ‘아들처럼 생각해 준다는 그럴듯한 사람’들한테 모욕을 당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는 형’, ‘아는 동생’과 같은 말들은 혈연을 상징하면서도 이 사회의 그늘진 관계를 모호하게 일컫는 수상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전통 사회의 가족 제도와 혈연관계에 바탕을 둔 이러한 가족 호칭이 아쉽게도 ‘사회적 관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시민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데도 이것을 엉뚱하게 ‘혈연적 공생 관계’처럼 그려내는 것이다. 온갖 선후배, 동문, 동향, 학번, 기수 문화 등이 바로 우리 사회의 이 약점을 거름 삼아 뿌리를 뻗고 있다.
역사적으로 시민 혁명의 전통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이런 취약점은 교육과 성찰을 통해 극복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들과 딸을 ‘내 자식’으로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공민’으로 길러야 한다. 그래서 시민적 이해관계에서 떳떳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차세대 공민’의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내 새끼’를 아무리 애지중지 잘 길러봤자 이 세상 야수들의 먹잇감밖에 되지 않는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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