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기억의 학살자들

등록 2017-08-10 18:11수정 2017-08-10 20:34

서경식

8월이 왔다. 8월은 전쟁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달. 되살아나는 기억과 그것을 봉인, 왜곡, 소거, 미화하려는 세력에 대한 항쟁의 달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일 새가 없었다. ‘망각에 대한 기억의 싸움’은 시종 기억 쪽이 고전하는 가운데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 그 정도가 심하다.

지난 1년간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 총리와 그 주변(아내와 친구들)에 의한 권력의 사물화가 큰 문제로 대두했다. 국회에서 추궁당한 정치가나 관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되풀이한 발언은 “기억에 없다” “기록은 폐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의도된 거짓말이고 ‘기억’ ‘기록’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비달나케가 쓴 <기억의 암살자>라는 저작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부모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사건을 겪은 저자는 고대 그리스사 전문가인데, 홀로코스트 부정론, 역사수정주의와 싸웠고, 이 저작을 남겼다. 저자는 또 알제리 전쟁에서는 프랑스로부터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으며, 프랑스군이 고문을 자행한 사실을 고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책 이름에 빗대자면, 일본에서는 예전의 식민지배·침략전쟁의 ‘기억’이 계통적으로 압살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 현 정권의 부정부패 ‘기억’이 살해당하고 있다. 그것도 은밀한 ‘암살’이라기보다 오히려 백주의 공공연한 ‘학살’이다.

‘기억’을 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되는 ‘말’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퇴각’을 ‘전진’이라 하고, ‘전멸’을 ‘옥쇄’라, ‘패전’을 ‘종전’이라 바꿔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의 왜곡은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일상화돼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그 왜곡 양상은 질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피케이오(PKO·평화유지활동)법에 근거한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현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현장부대의 보고를 은폐하고(일본 피케이오법은 전투지역 파병을 금지-역주), 그 사실이 발각되자 “전투가 아니라 무력충돌이다”라고 우겼다. 이 보고서의 은폐공작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아베 총리가 총애한 방위대신(국방장관)은 자신은 몰랐다고 계속 잡아뗐고, 대신 자리에서 물러난 뒤 야당이 그를 국회에 불러 진상을 규명하자고 요구했으나 여당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지지율이 내려가기 시작한 아베 총리가 입으로는 “하나하나 정중하게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실정은 그 정반대다. 이 모든 것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말’에 대한, 따라서 ‘기록’이나 ‘기억’, 나아가 ‘역사인식’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주의다. 기록은 수정 또는 은폐할 수 있고, 기억은 왜곡 또는 소거할 수 있다, 사람들은 결국 ‘망각’할 것이고, 그것이 권력에 유리할 것이라는 확신. 바로 기억 살육자의 음습한 확신이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부터 참으로 집요하게 이 기억 살육 프로젝트를 실행해 왔는데, 그것은 1990년대 이후, 즉 아시아 피해자들의 일본 전쟁범죄 폭로 이후 노골화했다. 이는 단지 일본 국가주의의 대두라기보다는 ‘말’의 파괴(즉 말로 뒷받침돼온 보편적인 이성이나 지성의 파괴)라는 의미에서 더 근본적인 위기라고 해야 한다.

진실을 존중할 생각이 없는 상대와 진실을 토대로 삼아 논의를 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농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대를 “부끄러움을 알라”고 비판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까. 논리적 정합성 따위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상대에게 사리에 맞게 논의하자고 요구해봤자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상대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으며,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의 욕망’밖에 없게 된다. 설령 극우 배외주의자와 같은 공격적인 자세까지 취하진 않더라도 타자와의 대화 자체에 대해 처음부터 냉소적인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바로 ‘윤리적 참사’다. 오래 이어지고 있는 이 ‘윤리적 참사’ 때문에 일본 사회가 이미 입고 있는 상처를 극복하려면 지금 바로 대응에 착수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몇 세대가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현상을 방치한다면 일본은 가까운 장래에, 1930년대에도 그랬듯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인류 평화의 파괴자 역할을 다시 떠맡게 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 내가 떠올리는 것은 전에도 몇 번 얘기했지만, 가토 슈이치 선생이다. 2008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일본과 세계의 현상을 어떻게 볼까?

가토 슈이치는 일본의 ‘전후(戰後) 민주주의’의 사상과 정신을 가장 명료하게 체현한 지식인이었다. 침략전쟁과 패전이라는 실패 경험을 아프게 되새기면서 향후 일본 사회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가려는 정신, 그것을 통해 ‘인간적’인 보편적 가치를 사회 전체에 실현해 가려는 이상주의. 그 사상과 정신은 패전 뒤의 일본에서 수백만명의 자국민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피침략 민족들의 피로 물든 땅에서 움튼 파릇파릇한 풀이었다. 하지만 ‘전후 민주주의’의 이상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일본에서는 소수파였고, 70여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후 민주주의’는 천황제를 온존시킨 것,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인식을 결여하고 있는 것 등 많은 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결함들을 지녔으나, 그럼에도 ‘인권’ ‘민주주의’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들은 비록 원칙만일지라도 전면에 내세웠다. 우파, 보수파의 저항은 있었지만 이 원칙에 실질을 부여해서 그런 결함들을 극복해 가는 것이 전후 일본의 진보파에게 부과된 책무였다. 전후 잠시 동안은 그런 개혁의 희망을 내버리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후 민주주의가 내걸었던 보편적 가치들은 냉소에 부쳐졌고 그 대신 이익과 힘만 신봉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국가권력의 횡포 이상으로 개탄스러운 것은 반지성주의가 횡행하고, 냉소와 무관심이 만연해 있는 현상이다. 지식인들은 이 위기에 저항할 책무를 지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식인 다수도 이 증상에 감염돼 자기 역할을 포기하거나 오히려 자발적으로 반지성주의 쪽에 가담해 가짜 지식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가토 슈이치가 쓴 ‘말과 전차’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는 ‘자유화’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이 군사개입을 해서 진압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지근거리에서 자세히 목격했다. “말은 제아무리 날카로워도, 또한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되더라도 한 대의 전차조차 파괴할 수 없다. 전차는 모든 소리를 침묵시킬 수 있고, 프라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라하 거리의 전차라는 존재 그 자체를 스스로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말이 필요하다. (중략) 1968년 봄 가랑비에 젖은 프라하 거리에서 마주한 것은 압도적이고 무력(無力)한 전차와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말이었다.”

그 시기(196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에 파병하고 나중의 유신체제를 향해 독재를 강화하고 있었다(1969년 ‘3선 개헌’).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손에 사살당했고, 프라하보다 10년 남짓 늦게 한국에도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1980년 광주5·18 때 탄압당했다. ‘전차’가 ‘말’을 뭉개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뒤에 ‘말’이 ‘전차’를 압도하는 순간이 거듭 찾아왔다. 그 최근의 것이 시민의 평화적 시위로 박근혜 탄핵을 쟁취한 투쟁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말’이 자근자근 압살당해 공동화해 버렸다. ‘말’에 대한 신뢰가 근본적으로 파괴당해 일본의 정치권력은 ‘전차’ 없이도 인민을 통치할 수 있다. 이에 저항하려 하는 사람들은 ‘말’을 재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문필가, 저널리스트, 교원 등 말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임은 무겁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이런 대통령 처음 봤다”, 이젠 더 이상 기대가 없다 1.

[사설] “이런 대통령 처음 봤다”, 이젠 더 이상 기대가 없다

삼성전자 위기론을 경계한다 [뉴스룸에서] 2.

삼성전자 위기론을 경계한다 [뉴스룸에서]

[사설] ‘김건희 특검법’이 정치선동이라는 윤 대통령 3.

[사설] ‘김건희 특검법’이 정치선동이라는 윤 대통령

“한국=현금인출기” 돌아온 트럼프, 앞으로 어떻게 되나 [뉴스 뷰리핑] 4.

“한국=현금인출기” 돌아온 트럼프, 앞으로 어떻게 되나 [뉴스 뷰리핑]

김건희만을 위한 광대극, 이제 막을 내릴 때 5.

김건희만을 위한 광대극, 이제 막을 내릴 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