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이라는 말은 간결한 뜻매김이 쉽지 않다. 대개의 사전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든지 ‘망령된 말’, ‘정상을 벗어난 말’과 같이 퍽 ‘감정적’인 표현을 그 뜻풀이에 사용한다. 곧 ‘뜻풀이’만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고 무언가 감성 체험을 해보아야 비로소 말뜻이 이해 가능하다. 매우 복잡한 감성이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들어 이 말의 쓰임새가 조금 더 넓어졌다. 미인으로 유명한 연예인이 ‘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해서 ‘망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며 그 말의 느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망언이라는 단어와 밀접한 사람들은 역시 정치인들이다. 정치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셈이다.
망언은 듣는 사람의 속을 뒤집어 버린다. 문제는 그 분노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워낙에 근본적인 윤리감각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에 합리적인 설명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니 동일한 망언이 계속 반복되면 사실 대책이 없다. 국내 정치인들의 망언에는 투표로 심판할 수도 있건만 외국 정치인들의 발언이면 손을 쓸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화를 내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발언 내용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반격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로 망언을 일삼으면 그들의 군 조직이 성노예 혹은 성매매와 어떤 동업 관계에 있었는지를 거론해야 하고, 그들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문제 삼아야 한다. 그래서 ‘합리성의 지배’라는 대원칙을 더 강하게 지켜야 한다.
급하게 화내는 사람보다 질기게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망언이라고 목청을 돋우기 이전에 어떤 원리를 적용하는 게 유리한지를 냉정하게 살피는 지성이 더욱 필요하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