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는 미국의 거대기업이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슈퍼돼지 ‘옥자’와, 옥자를 10년 동안 키운 소녀 ‘미자’의 모험 서사를 통해 자본주의 육식 시스템을 조롱하는 블랙코미디다. ‘옥자’는 왜 돼지인가? 돼지의 지능지수(IQ)는 진돗개(IQ 60)보다 높은 70~80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돼지들이 정신 이상을 겪는 것은 열악한 삶의 조건 때문이다. 이빨이 뽑히고 꼬리가 잘린 후 0.43평 남짓한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보낸다. 도살장에서는 마취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도축 직전 각성을 일으켜 죽음의 과정을 생생히 겪는다. 구제역이 발생하면 땅속에 산 채로 묻힌다. 봉준호 감독의 고백에 따르면 <옥자> 시나리오를 쓰던 2015년 어느 날 미국 콜로라도의 대형 도축장에서 동물들이 ‘분해’되는 과정을 자세히 본 후 두 달 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했다. 정치적 철학적 결정 때문이 아니라 도살장에서 맡은 강렬한 냄새가 계속 몸을 따라오는 것 같아 절로 못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힌두교 경전 <브라흐마나>에는 저승을 들여다본 성자 브라구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있는 이들을 만난 브라구가 연유를 물었더니 “이 사람들이 저 세상에서 우리의 팔다리를 잘랐으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그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승에서 사람들에게 도살당해 먹힌 동물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그 사람들을 잘라 먹고 있었던 것이다. 고기라는 말은 범어(梵語)로 맘사(Mamsa)인데, ‘맘’은 ‘나를’이라는 뜻이며, ‘사’는 ‘그가’라는 뜻이다. ‘이승에서 내가 먹은 그가 저승에서 나를 먹는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경전은 여기에 대한 구제책으로 희생을 제시한다. 희생의 행위가 살아가는 동안 지은 죄의 응보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들여다보면 서사를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희생이다. <플란다스의 개>는 개가 누군가에게 희생되면서 벌어지는 추적극이며, <살인의 추억>은 희생자가 가해자와 함께 캄캄한 심연 속으로 끊임없이 사라지는 미로의 극이다. <괴물>에서는 희생자인 ‘괴물’이 자신이 희생자인 줄 모른 채 가해자가 되어 ‘인육 만찬’을 벌이는 동안 서사의 중심인물인 소녀 현서는 죽음의 맨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마더>는 아들을 ‘희생자’로 생각하는 어머니가 아들이 저지른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목격자를 살인함으로써 스스로 가해자이면서 희생자가 되어 모성의 신화를 그로테스크하게 균열시킨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상 이변이라는 묵시록적 재앙 속에서 유일한 삶의 공간인 설국열차가 열차 밑바닥에 갇힌 어린이들과 하층계급인 꼬리칸 승객들의 희생을 동력원으로 연옥의 축도인 삶의 무한궤도를 질주한다. 그리고 <옥자>. 인간에 의해 엔지니어링된 슈퍼돼지 ‘옥자’는 자본이 구축한 육식 시스템 희생자의 표상이다. 그 생명체는 놀랍게도 산골 소녀 미자의 ‘솔메이트’다. 참된 생명의 공간에서 희생의 공간으로 갈 수밖에 없는 옥자의 운명을 미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자에게 옥자의 운명은 곧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옥자>의 중심 주제와 봉준호의 세계관이 집약되어 있다. <옥자>가 문제적 영화인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운명이 곧 인간의 운명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육류 소비의 가파른 증가가 환경 재앙으로 이어진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2014년 9월 케임브리지대학과 애버딘대학 공동 연구진은 “현재와 같은 추세로 육류 소비가 진행되면 2050년까지 예상을 크게 초과하는 온실가스 배출로 이어져 치명적인 환경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육식 시스템을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는 철학자 피터 싱어는 “만일 식물도 동물처럼 고통을 지각할 수 있는 존재로 밝혀진다면 식물은 도덕적 존재”라고 했다. 피터 싱어에게 동물은 도덕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일 수도 있는 동물을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한 후 도축하여 정교하게 분해해서 이빨로 뜯고 씹어 캄캄한 내장 속으로 끊임없이 삼킨다. 봉준호 감독이 미자로 하여금 옥자를 살리게 한 것은 ‘도덕적 존재’에 대한 봉준호식 애정의 표현일 것이다. 측량이 불가능한 동물의 고통들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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