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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올 데까지 왔다

등록 2017-06-15 19:08수정 2017-06-19 13:48

서경식

시인 윤동주가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한 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게 72년 전이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치안유지법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 등 조선인 학우들과 함께 “일본 패전에 대한 헛된 생각을 갖고, 기회를 틈타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해야 한다고 맹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동을 한 건 없다. 다만 마음속에 조선 독립의 꿈을 품고 그것을 학우들과 이야기한 게 죄였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그 속마음을 처벌했다는 데에 치안유지법의 무서운 본질이 있다.

“일본은 마침내 올 데까지 왔다.” 요즘 부쩍 그런 느낌이 든다.

특히 그렇게 느끼게 만든 최근 사태를 예로 들자면, 법무대신이 6월2일 국회 답변에서 주저 없이 예전의 치안유지법이 “적법하게 제정”됐으며 “손해배상도 사죄도 실태조사도 하지 않겠다”고 답변한 일이다. 이 법은 “사유재산제의 부정”과 “국체(천황제)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금지한 것으로, 대일본제국의 사상범·정치범 탄압의 주요 무기였다. 저명한 소설가 고바야시 다키지나 철학자 미키 기요시, 창가교육학회와 오모토교(大本敎) 등 종교단체도 탄압을 받아 고문사, 옥중사하는 등 희생자도 많았다. 그 때문에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도 해야 할 이 악법은 포츠담 선언 수락과 함께 점령군 총사령부의 요구로 폐지되고(1945년 10월), 탄압에 악명을 떨친 특별고등(특고)경찰도 폐지됐다. 그 치안유지법이 ‘적법’한 것이었다고 법무상이 국회에서 답변한 것이다.

“일본은 올 데까지 왔다”고 내가 느낀 것은, 치안유지법의 재현이라고 비판받는 ‘공모죄’ 법안을 둘러싼 국회 질의 중에 이런 답변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고 이에 대해 여론도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정권만 해도 건성으로라도 “과거 치안유지법은 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지금의 일본 사회는 과거와 다르다”는 수사로 비판을 피해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듯, 실로 거리낌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다음 해인 2012년 12월,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 “일본을 되찾자”는 구호를 내건 제2차 아베 정권이 출범했다. 이후 5년, 일본의 극우화, 전체주의화는 그칠 줄을 모른다. 2013년에 ‘특정비밀보호법’, 2015년에는 안보법제를 모두 강압적으로 통과시켰고 지금은 통칭 ‘공모죄’가 국회 심의 최종단계에 올라 있다. 다음에는 그들이 대망하는 헌법 개악이 기다리고 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때까지 개헌하겠다고 5월3일 헌법기념일에 아베 총리 자신이 공언했다. 한편에서는 아베 총리와 아내, 친구들이 얽힌 대형 비리사건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야당과 여론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아베 정권은 앞뒤 가리지 않고 계속 은폐와 위압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1925년에 공포된 치안유지법은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에서도 천황 칙령으로 시행됐다. “조선독립 기도”는 “국체 변혁” 죄에 해당한다 하여 일본인보다도 조선 사람들에게 몇배나 더 가혹하게 적용했다. 일본 본토에서는 이 법에 의한 사형 판결은 없었으나 조선에서는 1928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저격 사건’ 관련자 2명을 비롯해 1930년 ‘5·30 공산당 사건’의 22명, 1936년 ‘간도 공산당 사건’ 18명, 1937년 ‘혜산 사건’ 5명 등에 대한 사형 판결이 잇따랐다.(미즈노 나오키 <일본의 조선지배와 치안유지법>) 치안유지법은 조선 식민지배를 위한 주요 폭력장치였다. 그것만으로도 천황제 및 천황 히로히토 개인은 조선 식민지배의 책임을 면할 수 없으나 일본인들 다수에게 그런 자각은 없다.

오기노 후지오의 연구(<특고경찰>)에 따르면, “(전향 문제와 관련해 특고경찰이 취한 입장의) 대전제에는 사상범죄자라 하더라도 ‘일본인’에 대해서는 ‘일본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은 나치당 고관 하인리히 힘러는 일본인은 폭력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전향을 하는가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는 ‘야마토 민족’이 아닌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일본정신’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오직 가혹한 폭력으로 제압하든지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

구미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인 ‘유럽적 보편주의’(월러스틴)를 모방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거기에 ‘팔굉일우’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적 보편주의’를 덧붙였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조선인 등 아시아 피침략민족들은 ‘일본정신’의 숭고한 보편성을 이해할 수 없는 열등한 무리였으므로 오직 모멸적이고 폭력적으로 대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다.

지난해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2016)를 봤는데, 특고경찰의 취조 장면에서 형사가 줄곧 조선민족의 독립 지향을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며 거만하게 설교하는 장면이 바로 그런 상황을 꽤나 리얼하게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영화 후반 일본인 여학생이 윤동주 시집 영역판을 내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한다는 가공의 설정에서는 위화감을 느꼈다. 윤동주는 당시 일본인들 속에서 철저히 고립돼 있었을 것이고 주변의 일본인들이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쉽게 씌어진 시>)라는 시구절이 더욱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기 직전에 질렀다는 마지막 외마디도, 그 의미를 알아들은 일본인은 아무도 없었다.

시인은 자신의 모어(母語)로 시를 쓰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압수당한 미발표 원고는 영원히 없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형사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조롱받고 억지 설교를 듣고 이국의 감옥에서 죽어가야 했다. 그 통분과 슬픔, 분노는 지금도 많은 조선민족이 공유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가해자들이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그러기는커녕 치안유지법이 적법이라고 태연히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패전과 포츠담 선언 수락이라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식민지지배 책임도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제도 진상규명조차 불철저했던 우리는 치안유지법 등에 의한 정치탄압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상태다. 해방 뒤 통일체로서의 조선민족이 주체가 돼 확실한 진상규명과 책임추궁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 분단된 것도 일본의 극우파와 역사수정주의자들을 도와주는 결과가 됐다. 통탄스러운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그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의 배외주의의 창날은 점점 ‘한국인’ ‘조선인’을 향하고 있다. 5월23일 나고야의 재일 조선인계 신용조합에 한 남성이 난입해 기름 적신 천에 불을 붙여 등유를 담은 플라스틱통과 함께 카운터 안으로 던졌다. 경찰에 출두한 용의자(65)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부터 한국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고 진술했단다.

아베 총리가 총애하는 이나다 도모미 방위대신과 극우 배외주의단체 ‘재특회’의 친밀한 관계가 5월30일 최고재판소에서 확인됐다. 미국으로 치면 국방장관과 큐클럭스클랜(KKK·백인우월주의 비밀단체) 간의 친밀한 관계가 인정된 셈이다. 최소한 대신직 사임까지 갈 만한 스캔들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지금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조선민족과 일본인을 대립시키고 이간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보편적 과제를 공유하고 연대하며, 동아시아에 과거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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