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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계의 창] 한국 새 정부에 기대하는 비전 / 진징이

등록 2017-05-21 19:37수정 2017-05-21 20:17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어느 북한 전문가는 10여년 전에 쓴 북핵 관련 글들을 지금 날짜로 고쳐서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북핵은 커져왔는데 그 논의는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해왔다는 이야기이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과 거리를 두겠다던 박근혜 정부였지만, 북핵 문제에서는 오히려 이명박 정부보다 더 강하게 북한을 밀어붙였다. 미국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도널드 트럼프 역시, 북핵 포기를 선제조건으로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북핵 문제가 ‘북-미 간 문제’라고 강조해왔지만, 이제 북핵은 북-중 관계의 최대 걸림돌이 됐다. 한-중 관계를 최악에 빠뜨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도 그 뿌리는 북핵이다. 시진핑과 트럼프의 첫 만남에서 주요 의제도 북핵이었다. 북핵은 명실공히 동북아 국제정치의 축소판이다.

그런 북핵 문제가 수십년을 경유했으면, 으레 그 해결에 긍정적 진전이 있어야 역사 발전의 법칙에 맞을 것이다. 하지만 북핵 문제는 초기의 대화와 빅딜로부터, 제재와 압박으로 ‘진화’해왔고, 이제는 끝장 볼 압박만을 남겨둔 것 같다. 중국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지만, 실제 행하는 대북제재는 사상 초유다. 미국은 항공모함을 총동원하고 사드까지 배치하며 북한을 압박한다.

북한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미국은 강자에게 약하기에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물러선다는 것이 북한의 확고한 판단이다. 그 밑바탕에는 자기들의 지정학적 지위 때문에 미국이 쉽게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인식도 깔려 있다. 결국 북한의 강공(强攻)과 강수(强守)에 미국은 힘을 과시하면서도 힘밖에 없는 무기력을 드러내고 있다.

북핵이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시점에 한국의 새로운 정부가 막을 올렸다. 어찌 보면 문재인 정부 출범에도 북핵은 변수였다. 북한이 한국 대선 기간에 6차 핵실험을 강행했다면,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른다. 미·중의 압박이 북한의 새로운 핵실험을 막았다지만, 오히려 한국의 대선이 더 큰 변수였을 수 있다. 지난 두 보수정권에 넌더리가 난 북한이다. 핵실험이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는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역으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북한의 ‘기대’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은 어찌 보면 한국전쟁 후 최악의 한반도 상황과 북핵으로 들끓는 동북아 정국에서 임위수명(臨危受命·위기에 임하여 명을 받들다)했다고 볼 수 있다. 산적한 국내 문제, 최악의 남북 관계,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대결, 모두 산 넘어 산이다. 북핵으로 짜인 프레임은 새 정부 운신의 폭을 제한한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5·24 조처, 어느 것 하나 풀기 쉽지 않다. 당장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북한의 비난도 시작됐다. 한국 내 보수와 북한의 협공도 나올 것이다. 거기에 북한이 새로운 핵실험을 강행하면, 자의건 타의건 끌려들어가 다시 지난 정부들의 ‘북핵 패턴’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난세에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근대사 이후 동북아의 낡은 질서 붕괴나 새 질서 태동은, 모두 한반도를 진원지로 시작했다. 지금도 다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새판을 짜고 있다. 당대 주요 2국(G2)으로 불리는 미·중이 북핵 문제에서 협력 태세를 보이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러기에 위기는 한국에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의 운을 실어올 수도 있다. 물론 트럼프도 언젠가는 다시 중국을 옥죌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중-미 협력은 한국에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 새 정부는 북핵 등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과 많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그 공감대를 트럼프의 미국과 공유하면서 한·미·중의 새로운 프레임을 짤 수는 없을까? 한반도 문제로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뿐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적어도 20년 후를 내다보는, 남북관계를 돌파구로 하는 새로운 비전과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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