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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악몽의 시대에 보는 영화

등록 2017-04-20 18:29수정 2017-04-20 20:52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지난해 말께부터 어깨와 팔이 아프기 시작해 2월, 3월에는 전자메일 답장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노화에 따른 신경통 같은데, 나는 이 증상을 ‘트럼프 증후군’이라 부르고 있다.

4월6일, 미군은 돌연 시리아를 공습했다. 트럼프는 정부군 쪽 화학무기에 희생당한 ‘예쁜 아기’ 영상을 보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는 화학무기의 보유도 사용도 부정하면서 중립적인 기관의 공정한 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확증도, 국제기관에 의한 사전 합의도 없이 공격이 강행됐다. 트럼프는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찬을 하면서 “멋진 초콜릿케이크” 디저트를 먹기 직전에 공격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예쁜 아기’의 모습을 보고 작심했을 정도로 인도적인 그가 어떻게 난민의 입국은 계속 거부해 왔을까. 바닥 지지율 회복을 위해 “미국에 손해가 가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종래의 주장과도 모순되는 즉흥적인 도박 행위에 나섰다는 견해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국 내에서 그의 지지율은 올라갔다. 미국은 그 뒤 아프가니스탄에서 ‘핵무기 다음가는 파괴무기’라는 거대폭탄(MOAB)을 사용했다.

이것은 북(조선)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항공모함이 한반도 근해를 향하고, 일본과 괌에 있는 미군기지는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북은 필요하다면 ‘초강경 수단’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누구보다도 솔선해서 그런 트럼프 대통령의 ‘결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의 부인도 얽혀 있는 비리사건 추궁을 당하면서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최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강행 돌파하는 호기로 생각하고 전쟁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을 것이다.

‘악몽의 시대’의 특징은 이성이 기능하지 않고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거나 과거의 경험칙에 따르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여긴 일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에서의 본격적인 전쟁 상태의 발발이다.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라는 낙관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다행히 거기까지 가진 않더라도 군사적 긴장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평화와 민주주의 기운을 크게 해친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파면까지 일궈낸 성과가 무산돼버릴 우려가 크다. 일본에서는 배외주의가 한층 더 고조되고 전체주의가 급속히 강화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반대파와 소수자가 터무니없는 희생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햐쿠타 나오키라는 작가가 있다. 아베 총리와 개인적으로 가까워서 그의 주선으로 2013년부터 한동안 <엔에이치케이>(NHK) 운영위원으로 근무했다. 그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렇게 공언했다. “만일 북조선의 미사일 때문에 내 가족이 죽고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테러를 조직해 일본 국내의 적을 해치우겠다.” 이에 대해 많은 찬사가 쏟아진 모양이다. 일본 국민은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나치스의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와 르완다의 대학살 사건들로부터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수자는 지금 어떤 심정이겠는가. 이런 트위터를 내보내는 ‘작가’나 거기에 ‘좋아요’의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어디까지가 본심인지, 그냥 장난으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분명 소수자의 정신을 좀먹고 생명을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켄 로치 감독의 최근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지난해 제69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다. 평일 오후였으나 영화관은 만원이었다.

영국 북동부의 뉴캐슬에 사는 59살의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홀로 살고 있다. 심장병으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일을 중단했기 때문에 필요한 공적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복잡한 제도의 벽에 부딪혀 좀체 진척이 되지 않는다. 다니엘은 장애인 수당 심사를 받으라는 복지사무소에 호출당한다. 취업할 만한 건강상태가 아니라는 의사의 처방이 있었지만 복지사무소의 담당자는 매뉴얼대로 무의미한 질문을 되풀이한 끝에 취업할 수 있다는 판정을 내린다. 직업알선소에 가니 직원은 관료적이고 모욕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게다가 실업보험 신청 절차는 난관투성이다. 시스템이 완전히 디지털화돼 있어 컴퓨터를 모르고 살아온 다니엘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고생 끝에 긴 신청서를 다 작성했지만 마지막에 ‘에러’ 표시가 뜨고 신청작업은 실패했다. 전화로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끝없이 기다리라고만 한다.

이미 ‘고령자’로 분류돼 있는 나는 이 장면에 크게 공감했다. 나라면 화가 나서 “관두시오”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겠지만, 생계가 걸려 있는 다니엘로서는 그럴 수도 없다.

어느 날 직업알선소에서 다니엘은 한 여성이 냉대를 당하고 있는 것을 봤다. 그녀는 면담에 약간 지각했다는 이유로 복지신청 접수 거부라는 부당한 조처를 당해 최저 생활에 필요한 돈마저 받을 수 없다. 이 여성 케이티는 어린아이 둘을 떠안은 싱글맘이다.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어서 손을 내민 다니엘과 케이티는 가까워지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서로 도우며 살아가려 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적어도 세 번, 울고 말았다. 한 번은 아이들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푸드뱅크(음식을 무료로 나눠주는 복지단체)를 찾아간 케이티가 너무 배가 고파 통조림을 까서 허겁지겁 내용물을 입에 집어넣는 장면. 두 번째는 다니엘이 죽은 아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 세 번째는 생활에 쪼들린 케이티가 결국 몸을 파는 장면.

다니엘이 억울하게 삶을 마감하는 최후의 장면에서는, 오히려 그가 마침내 삶의 무거운 짐을 벗은 데에 해방감마저 느꼈다.

영화가 끝나자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영국의 복지행정이 얼마나 충실한지를 표현하는 말이요 이상적인 사회를 보여주는 표어다. 켄 로치 감독은 좋아하는 영화로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데시카 작품 <자전거 도둑>(1948)을 든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황폐와 빈곤 속에서 유일한 생활수단인 자전거를 도둑맞은 불운한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인데, 내게도 잊을 수 없는 명작이다. 그 시절로부터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세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2013년 4월, 대처 총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켄 로치는 신문에 ‘조사’를 기고했다.(<가디언> 2013년 4월8일) “마거릿 대처는 현대에 가장 심각한 분단과 파괴를 부른 총리였습니다. (중략) 오늘날 우리가 놓여 있는 비참한 상태는 그녀가 시작한 정책의 결과입니다. (중략) 그녀가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학대자요 살인자인 피노체트를 다과회에 초대한 사실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녀에게 어떻게 조의를 표해야 할까요? 그녀의 장례를 민영화해 버립시다. 경쟁입찰에 부쳐서 가장 싼 값을 적어낸 업자에게 낙찰하는 겁니다. 그녀도 분명 그걸 바라고 있었겠지요.”

<뉴스위크>에 ‘켄 로치가 그린 영국의 냉혹한 현실, 복지체제에 저항한 다니엘(Daniel Against the System)’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 소개 기사가 실렸다.(준 토머스, 일본어판 2017년 3월21일) 그 맺음말은 이렇게 돼 있다. “미국 관객들은 (영국은) 다니엘의 의료비를 국가가 부담해주니 (미국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미국의 대통령이 대부호 트럼프이고, 누구보다 충실한 트럼프 추종자가 아베 신조다.

일관되게 가난한 서민의 입장에서 정의를 계속 추구해온 켄 로치 감독이 80살이 된 지금도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 비극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서민들의 선함에 대한 믿음과 불굴의 투지는 후대에게 주는 복음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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