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정찬, 세상의 저녁] 예수의 존재성과 박근혜

등록 2017-01-19 18:33수정 2017-01-19 20:25

백남기 농부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숨지기까지 사과 한번 하지 않은 대통령, 세월호가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대통령으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자식 잃고 피눈물 흘리는 유가족을 외면한 대통령을 예수로 비유하면서 백주대로로 나서는 그들을 보면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한 예수의 모습이 아프게 떠오른다.
정찬
소설가

지난 1월14일 탄핵 반대 집회를 연 친박단체는 십자가를 지고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서석구 변호사가 탄핵 심판 2차 변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예수로 비유한 발언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예수가 예루살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적용된 율법은 ‘성전 모독’이었다. 예수의 성전 모독은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마르코의 복음서 14:55-59)는 말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종교가 곧 정치인 신정체제의 예루살렘에서 성전은 정치권력의 원천이었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자, 합법적으로 희생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물론 타국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이 해마다 성전세를 내고 재산을 기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희생제물 거래와 서원의식에서 나오는 수입도 엄청났다. 성전은 통치 이데올로기의 토대이자 경제의 토대였다. 이런 성전을 예수가 헐어버리겠다고 했으니 예루살렘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유대 민중들은 성전 권력의 부패 구조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성전의 존재 이유는 희생제물을 바쳐 신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희생제물을 바치기가 무척 힘들었다. 일반 짐승과 제물용 짐승의 가격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똑같은 짐승임에도 성전 안의 상인들은 수십 배의 폭리를 취했다. 성전 상권은 최상위 권력계층인 고위 제사장 계급이 장악하고 있었다.

유대 광야를 흐르는 요르단강의 물로 죄를 씻으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민중이 열광한 것은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성전의 핵심 역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요한이 모를 리 없었다. 요한의 죽음 이후 예수는 요한의 외침을 넘어서서 성전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했다. 그가 스스로 십자가를 세운 것이다.

유대인에게 식탁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느님에 속해 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식탁의 초대 손님을 신중히 고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수가 식탁에 초대하는 이들은 상인, 세리, 농부, 어부, 떠돌이 노동자, 대장장이, 석공, 양치기, 병든 자, 파산한 자, 버림받은 자, 누더기를 걸친 자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하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학대받는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 어린아이들이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자와 제사장 계급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할 때에는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세상을 거꾸로 세우겠다고 했다. 세상을 거꾸로 세우면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은 자가 되고,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자가 된다고 했다. 꿈꾼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세우겠다고 했다. 그 세움의 구체적 형상이 십자가였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는 그가 타인에게서 느낀 고통의 무게였다. 그는 타인의 고통에 한없이 예민했다. 그에게 고통은 ‘나’와 ‘너’라는 분리된 두 존재를 연결하는 신비한 생명체였다. 예수의 거룩함은 여기에 있다. 고통과 슬픔에 빠진 이에게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곁에 있음을 느낄 때 그보다 더한 위로가 어디 있을까. 타인의 불행을 응시하고, 아파하고, 달려와 불행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은 고통을 신비한 생명체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백남기 농부가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숨지기까지 사과 한번 하지 않은 대통령, 세월호가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대통령으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자식 잃고 피눈물 흘리는 유가족을 외면하고는 탄핵 가결 후 “피눈물이 난다는 게 어떤 말인지 이제 알겠다”고 말하는 대통령을 예수로 비유하면서 백주대로로 나서는 그들을 보면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한 예수의 모습이 아프게 떠오른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트럼프 재선, 국익 위한 ‘유연한 외교’로 방향 전환해야 1.

[사설] 트럼프 재선, 국익 위한 ‘유연한 외교’로 방향 전환해야

파병 북한군, 능소능대와 허허실실을 구현하다 2.

파병 북한군, 능소능대와 허허실실을 구현하다

[사설] 교수들의 줄잇는 시국선언, 민심의 준엄한 경고다 3.

[사설] 교수들의 줄잇는 시국선언, 민심의 준엄한 경고다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유레카] 4.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유레카]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5.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