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예비치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후쿠시마에는 내가 체르노빌에서 본 것들이 모두 다 있다.” “국가는 자신을 지킬 뿐 사람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사회에 ‘저항’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체르노빌 사고 때에도 국가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옛 소련)가 전체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은 왜 그런가?”
도쿄경제대 교수 이 글을 2016년 12월11일에 쓴다.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엊그제 한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의가 압도적 다수로 가결됐다. 최근 끈질기게 이어지면서 날로 기세를 더해온 시민운동의 승리다. 물론 앞날을 낙관할 순 없으나 한국 시민이 지닌 ‘저항’문화가 건실한 힘을 발휘한 데에 대해 일본 도쿄에서나마, 아니 도쿄에 있기에 더더욱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런 심정으로, 이번에는 벨라루스의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소개해볼까 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은 밥 딜런에게 돌아갔는데, 지난해 수상자가 알렉시예비치였다. 알렉시예비치가 도쿄외국어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돼 수상식 참석차 11월 하순에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가보고 싶어했던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지역을 찾아갔고, 그 모습을 <엔에이치케이>(NHK) 텔레비전이 촬영했다. 나도 거기에 동행했다. 나는 예전에 그와 텔레비전 방송 대담을 한 적이 있다.(‘파멸의 20세기’, 2000년 9월4~5일 NHK ETV2000)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30년 전인 1986년 4월26일 일어났다. 후쿠시마는 2011년 3월11일이다. 우리 대담이 이뤄진 것은 체르노빌 이후, 후쿠시마 이전이라는 타이밍이었다. 그의 대표작에 <체르노빌의 기도>(이와나미 현대문고)가 있다. 원저의 전문은 러시아 월간지 <민족들의 우호> 1997년 1월호에 발표됐다. 시사적인 것은, 그가 이 책에 ‘미래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인 점이다. 희망에 찬 ‘미래’가 아니라 체르노빌 사고로 드러난 파국적인 양상이 인류 모두의 미래를 뒤덮게 되리라는 예감이다. 나는 그와 함께 이번에 원전 피해지역을 걸었다. 나로서는 사고 뒤 5년간 4번째 방문이었다. 처음 찾아간 곳은 고향을 잃어버린 노인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다테 시의 임시가설주택. 그런데 행정당국은 재난지로의 주민 귀환을 촉진하기 위해 가설주택 폐쇄 등 지원 중단을 예고하고 있다. 귀환해봤자 집도 논밭도 방사능에 오염돼 있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생활필수품을 구입하기도 힘들다. 가족들 중 비교적 젊은 세대는 고향을 떠나 도시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세대는 장기적인 건강 피해가 예상돼 재난지역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있다. 그런 마을에 고령자들만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가. 다음에 찾아간 곳은 이타테 마을. 제염(오염 제거) 작업의 결과 방사성 폐기물을 채운 플레콘 백(Flexible Container Bag, 폐기물을 넣는 대형 자루)들이 갈데없이 방치된 채 200만개 이상 쌓여 있었다. 최종처분장은커녕 중간보관소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염작업은 마을 주택 주변이나 평탄한 곳으로 국한되고 광대한 산이나 숲은 손도 대지 못한 상태다. 빈집들이 즐비한 마을은 멧돼지 등 야생동물 천하가 됐다. 하지만 그 멧돼지는 잡아봤자 방사능 오염 때문에 식용으로 쓸 수 없다. 버섯이나 산나물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며 먹는 사람이 있다. 몰래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도 있다. 체내(방사능)피폭이 걱정된다”고 그 지역 낙농가 H씨는 말했다. 그는 낙농을 단념하고 축사를 허물었다. 4세대 8명이 살았던 집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거기서 가족이 함께 살아가기는 이젠 불가능하다. 소마 시 후쿠료젠에도 가 봤다. 낙농가가 자살한 마을이다. 대출을 받아 퇴비간을 지은 그는 필리핀인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고 아이를 낳아 키울 작정이었다. 하지만 방사능 오염 때문에 우유는 출하할 수 없게 됐고 매일 짠 우유를 그대로 버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출상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피난갔던 필리핀에서 홀로 자택으로 돌아온 그는 퇴비간 벽에 “원전만 없었다면”이라는 글을 써 놓고 목을 맸다. 생명보험금으로 대출금을 갚아 달라고도 써 놓았다. 도쿄전력은 그의 아내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자 “사고와의 직접적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배상을 거부했다(나중에 화해 성립). 아내와 아이는 마을을 떠났고, 지금은 폐허가 된 퇴비간만 남아 있다. 알렉시예비치와 나는 그 집 낙농가가 목을 맨 곳에 가봤다. 해가 저물어 한기가 오슬오슬 발밑에서 기어올라왔다. 안내해준 이웃집 노부인이 낙농가의 자살 당일 모습을 얘기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후쿠료젠을 오간 길은 5년 전에 한국 사진가 정주하씨와 함께 다닌 그 길이다. 전에 본 기억이 있는 길옆 민가 마당에 곱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려 있었다. 하지만 안내해준 그 마을 사람은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저건 먹을 수 없어요” 하고 우리에게 경고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이번에 일본에서 일찍이 자신이 예견했던 ‘미래’를 봤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홋카이도의 도마리 원전에 가 본 적이 있다. 거기서도 프랑스, 미국, 스위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모두 그에게 체르노빌 일을 묻고 동정을 표시했으나,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염려는 없다”고 한결같이 얘기했다고 한다. 체르노빌 이후, 후쿠시마 이전의 일이다. 지금은 ‘후쿠시마 이후’가 됐다. 인간은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다. 그것이 동시진행형으로 이토록 명백해진 적이 있었던가. 원전의 폐원자로 처리와 배상 등의 비용은 사고 뒤의 견적으로 몇조엔 단위로 늘고 있다. 20조엔에 달할 것이라는 추산까지 나오는 가운데 정부는 국민 부담을 늘리는 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은 12월7일 또다시 “원전은 싸다”고 강조했다. “여러 비용들을 전부 포함시켜도 발전단위당 코스트는 원전이 가장 싸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세코 경제산업상의 얘기는 거짓이다. 그것은 리쓰메이칸대학의 오시마 겐이치 교수 등의 식자들이 거듭 지적하고 있다. 설사 백보 양보해서, 이 논란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사고가 나면 장기적으로 파괴적인 피해를 안겨주는 원전에 이토록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 국가의 체면, 전력회사 주주들의 이익 보호, 원전 직원, 연구자, 건설업자, 지방정치가 등등 원전 마피아에 기생하는 사람들의 기득권 보호, 그리고 잠재적 핵무장 능력 유지 등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도쿄에 돌아온 알렉시예비치는 도쿄외국어대 기념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후쿠시마에는 내가 체르노빌에서 본 것들이 모두 다 있다.” “국가는 자신을 지킬 뿐 사람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사회에 ‘저항’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체르노빌 사고 때에도 국가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옛 소련)가 전체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은 왜 그런가?” 일본에서는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아베 내각 지지율이 60%나 된다. 이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공범자다. 나중에 “속았다”든가 “몰랐다”며 둘러댈 작정인가? 저 침략전쟁 뒤에 그랬듯이. 일본의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더더욱 내게는 한국 시민들의 ‘저항’이 귀중하게 여겨진다. 수많은 희생을 통해 획득한 그 문화를 앞으로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알렉시예비치의 근저 <세컨드핸드(중고품)의 시대>에 대해 얘기할 지면 여유가 이번엔 없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뇌의 숲(樹海)”을 떠올렸다. 러시아 근대문학에 등장하는, 굳이 불행이나 고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여성들을 연상시킨다. 언제 한번 자세히 얘기하고 싶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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