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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 세상의 저녁] 촛불의 미학

등록 2016-12-22 18:24수정 2016-12-22 20:21

카메라는 바람에 꺼진 촛불을 다시 켜고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고르차코프의 모습을 묵묵히 보여준다. 몇 차례 실패 끝에 마침내 ‘저쪽’에 도달한 그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난다. 한국 사회의 ‘저쪽’은 어디일까? 우리가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저쪽’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로에게서 희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찬
소설가

어둠의 바다를 표류하던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한 것은 허허벌판 같았던 광장에서 촛불이 켜지면서였다. 정치권은 물론 권력의 시선만을 쫓으며 헌정 질서를 훼손해왔던 검찰이 촛불의 궤적을 조심스럽게 따라오기 시작하면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진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게 돼 있다’는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상징성을 몰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의 상징성에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예술인이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였다. 그는 영화예술의 바탕을 인간의 존재 양식에서 찾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비어 있는 세계의 지붕 밑에 고독하게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 연결된 수많은 끈으로 이어진 상태로 존재한다. 그가 어떤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세계와 인류의 운명과 연관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 “전쟁과 사회적 궁핍, 갖가지 잔인한 고통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며 서로를 발견하는 일은 인간의 성스러운 의무가 아닐 수 없다”고 천진하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이 심도 있게 구현된 영화가 여섯번째 작품 <노스탤지아>다.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고르차코프는 이탈리아의 성카타리나 온천 마을에서 도메니코라는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며, 구원을 실현하려면 두 곳에서 동시에 불을 밝혀야 한다고 역설한 후 고르차코프에게 또 다른 하나의 불을 밝혀달라면서 초를 건넨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노인이 밝히는 불은 자신의 몸을 태워 일으키는 불이며, 그것에 대응하는 불이 고르차코프가 들게 되는 촛불이다.

도메니코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탈리아를 떠날 채비를 하던 고르차코프는 도메니코가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사흘째 인류 구원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급히 성카타리나 온천 마을로 향한다. 그곳은 도메니코의 말에 따르면 촛불을 밝혀야 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도메니코가 세상의 구원을 희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있을 때 고르차코프는 작은 촛불을 들고 바람 부는 노천 온천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이 꺼지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조심조심 걷는다. 불이 꺼지면 도메니코의 희생이 덧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차갑고 캄캄한 바닷속에서 죽어간 이유를 밝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 자체가 촛불이었다. 그 촛불 앞에서 사람들이 나타낸 행위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대통령은 냉담했고, 대통령의 호위무사 같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다” “제대로 단식하면 벌써 실려 가야 되는 게 아닌가” 등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또 다른 하나의 불’을 켜고 있었다.

독일의 유력언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대통령 탄핵 소추안 국회 가결을 이끈 한국의 촛불 시위를 “촛불과 노래, 공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빛의 축제”로 묘사하면서 “멀지 않은 과거에 독재를 경험한 한국에서 수준 높은 시위와 민주주의를 보여줬다. 민주주의 역사가 긴 유럽과 미국이 오히려 배워야 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세월호의 촛불을 바라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켜고 있었던 촛불이 광장에서 빛의 바다를 이룬 것이었다.

예술작품에서 문제적 인간의 내면은 세계의 내면이다. 고르차코프의 촛불이 문제적 인간인 도메니크의 희생을 밝히는 것은 세계의 내면을 밝히는 일이다. 고르차코프는 촛불을 들고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노천 온천 속을 조심조심 걷지만 몇 걸음 만에 촛불이 꺼진다. 카메라는 바람에 꺼진 촛불을 다시 켜고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고르차코프의 모습을 묵묵히 보여준다. 몇 차례 실패 끝에 마침내 ‘저쪽’에 도달한 그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난다. 한국 사회의 ‘저쪽’은 어디일까? 우리가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저쪽’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로에게서 희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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