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평화’라는 이름 아래 전쟁 준비를 하고, “유일한 피폭국”으로서 핵 선제공격을 지지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사태다. “평화를 지켜라” “인간을 지켜라”라고 외치기 전에 먼저 “말을 지켜라”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일본 사회의 현실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8월6일,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의 진구지(신궁사)라는 절에 갔다. 이 절에서 한국 사진가 정주하씨의 작품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열리고 있는데, 이날 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토크쇼가 있었다.
이날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지 71년이 된 날이어서 진구지에서는 예년처럼 ‘원폭 위령제’가 열렸다. 넓은 본당에 마루키 이리·도시 부부의 대작 <원폭도> 시리즈 중에서 <까마귀>(그림)와 <오키나와 전도(戰圖)>가 전시돼 있었다. 주지 다카하시 다쿠시 스님은 설법에서 피해뿐만 아니라 가해의 기억에 대해서도 얘기하면서 이를 계속 간직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청중은 <원폭도>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묻는 정주하씨의 사진 작품을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보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까마귀>에는 이런 ‘설명문’이 붙어 있다.
“원폭이 투하된 뒤 맨 나중까지 주검이 남아 있었던 건 조선인이라고 한다.
일본인은 많이 살아남았으나 조선인은 조금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다.
까마귀는 하늘에서 날아왔다. 엄청나게 왔다.
조선인들 주검의 머리 눈알은 까마귀가 와서 파먹었다고 한다.
까마귀가 눈알을 파먹었단다.(이시무레 미치코의 <국화와 나가사키>에서)
주검마저 차별받은 한국·조선인. 주검마저 차별한 일본인.
함께 원폭에 희생된 아시아인. 아름다운 저고리, 치마가.
날아가는 조선, 고향의 하늘로. 까마귀 완성, 삼가 이것을 바칩니다. 합장”
마루키 이리는 일본화가, 아내인 도시는 서양화가다. 히로시마는 이리의 고향이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당시 도쿄에 살고 있던 이리는 원폭 투하 3일 뒤 히로시마에 갔고, 도시도 1주일 뒤 합류해 두 사람이 함께 구호활동을 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50년 <원폭도 제1부 유령>이 발표됐다. 그 뒤 <원폭도> 시리즈는 1982년까지 32년간 계속 그려져 15부작을 헤아렸다. 1972년의 <까마귀>는 그 제14부다.
반핵평화운동과의 연대 속에 <원폭도>는 1953년부터 10년간 중국, 유럽 여러 나라, 소련 등에서 순회전시됐다. 그러나 그사이에 세계정세가 바뀌어 일본과 소련 공산당이 대립했고, 중국과 소련의 대립도 시작돼 반핵평화운동도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일본의 운동도 분열되고, 공산당원이었던 마루키 부부도 당에서 제명됐다.
베트남전쟁이 본격화한 가운데 <원폭도>는 1970년부터 미국 각지에서 순회전시됐다. 이 순회전시에서 마루키 부부는 “예컨대 중국인 화가가 <난징 대학살>이라는 그림을 그려 일본에 가져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 등 각지에서 관객들의 냉엄한 반응과 마주쳤다. 이런 경험은 마루키 부부가 미-일 관계뿐만 아니라 일본과 아시아 민족들과의 관계라는 복안(複眼)적인 전쟁 인식을 하게 만들었고, ‘원폭’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고자와 세쓰코 <‘원폭도’에 묘사된 ‘기억’, 이야기하는 ‘그림’>)
그 뒤 마루키 부부는 제13부 <미군 포로의 죽음>(1971)과 제14부 <까마귀>(1972)를 그렸다.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가 처음으로 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일본의 전쟁 책임과 엮어 의제로 삼고, ‘피해자 운동’에서 ‘다시 가해자가 되지 않는 운동’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도 1972년의 일이다. 마루키 부부의 공동제작은 그 뒤 난징, 아우슈비츠, 미나마타, 오키나와 등으로 이어졌다.
고자와 세쓰코는 (마루키 부부가 까마귀 모습에서) “차별과 억압을 내면 깊숙이 간직해온 서민의 모습을, 그리고 그 일원인 자신들의 모습을 본 게 아닐까” 하고 해독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나는 이것이 일본의 재파시즘화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교롭게도 아베 신조 총리가 정권에 복귀했고, 일본의 파시즘화 위기는 최근 수년 뚜렷이 표면화돼왔다. 일본의 이른바 ‘평화헌법’은 이미 그 전부터 진짜 평화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의 핵우산을 제공받으면서 자위대라는 이름의 세계 유수의 군사력을 갖추고, 메이지 초기에 식민지화한 오키나와에 (미군)기지 부담을 대부분 떠넘기고 있는 현실 위에 구축된 가짜 ‘평화헌법’이다.
한편으로 일본의 ‘평화헌법’은 일본인 자신들이 쟁취했다기보다는 중국, 조선, 아시아 민족들의 완강한 저항과 막대한 희생 덕에 거두어들일 수 있었던 과실이기도 하다. ‘평화헌법’은 일본 국민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아시아 피해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동의 없이 해석 변경이나 개정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945년 패전과 2011년 ‘후쿠시마’는 기본적으로 연속돼 있다. 공통점은 타자에 대한 사죄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패전 당시 전쟁 피해자들에게 “죄송했다”는 마음으로 재출발을 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후쿠시마’도 마찬가지다. 지구 환경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주었지만 사죄한다는 발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 위정자들은 ‘유일한 (원폭)피해국으로서’라는 판에 박힌 얘기를 되풀이한다. 국민들 다수도 같은 소리를 낸다. 그것만으로 자신들은 평화의 편에 서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것을 일본 국민 다수가 지지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타자의 머리 위에 핵무기를 쏟아붓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이상의 참화를 초래하는 것도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핵무기 선제 불사용 선언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반대하는 의향을 나타낸 것으로 보도됐다. 유엔 핵군축작업부회는 8월19일 핵무기 금지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2017년 유엔 총회에서 시작하도록 권고하는 보고서를 찬성 다수로 채택했다. 그러나 ‘유일한 피폭국’을 자처하는 일본은 거기에 기권했다(한국은 반대했다).
7월31일의 도쿄도 지사 선거에서는 핵무장론자로 알려진 전 방위대신 고이케 유리코가 당선됐다. 이 지사선거에서는 “조선인을 쫓아내라”고 공공연히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를 계속해온 인종차별주의자가 입후보해 11만표 넘게 득표했다. 11만표는 도쿄도 거주 재일 조선인 인구(한국적 포함)보다 많은 수다.
마루키 부부가 사재를 털어 세운 미술관 마당에 ‘통한의 비’가 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뒤에 6천여명이나 된다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일반 민중과 군경들 손에 학살당했다. 마루키 미술관이 있는 지역에서도 학살이 자행됐다. 그것을 결코 잊지 말자는 뜻에서 지역 주민의 반발을 무릅쓰고 마루키 부부가 이 비를 세웠다.
일본 국민 중에 마루키 부부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싶지 않다. 매년 여름 <원폭도>를 전시해온 다카하시 주지 스님과 같은 사람들이나 그 설법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는 매년 줄고 있다. 71년 전의 전쟁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과거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조차 죄 많은 망각의 기색이 짙다. “시간의 경과는 언제나 가해자 편이다.” 나는 토크쇼에서 그렇게 말했다.
“권력에 대한 싸움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싸움”(밀란 쿤데라)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일본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이 싸움에서 계속 패배해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망각이라기보다 오히려 기억의 기초가 되는 언어와 그 개념 자체가 내부에서부터 삭아 없어지듯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평화’라는 이름 아래 전쟁 준비를 하고, “유일한 피폭국”으로서 핵 선제공격을 지지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사태다. “평화를 지켜라” “인간을 지켜라”라고 외치기 전에 먼저 “말을 지켜라”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일본 사회의 현실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