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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잊고 싶은가 / 이제훈

등록 2016-08-28 17:43수정 2016-08-28 18:58

이제훈
통일외교팀장

박근혜 대통령은 말했다. “이번 합의는 피해자분들이 고령이시고 금년에만 아홉 분이 타계하시어 이제 마흔여섯 분만 생존해 계시는 시급성과 현실적 여건하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뤄낸 결과”라고. 지난해 12월28일 한국-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 직후 발표한 메시지다.

대통령은 그 뒤로도 자주, 강하게 말했다. 12·28 합의를 비판하는 이들을 ‘무책임한 선동꾼’으로 간주했다. “최대한의 성의를 갖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받아내서 제대로 합의가 되도록 노력한 그건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책임있는 자리에 있을 때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시도조차 하지 못해놓고 이제 와서 무효화를 주장하고 정치적 공격의 빌미로 삼는 건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1월13일 기자회견)

대통령은 ‘진심’을 강조하며 “지금도 많이 늦었다”(1월13일 기자회견)고, 절박성을 거듭 강조했다. “피해자 할머니가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중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3·1절 기념사)라고.

하지만 언젠가부터 대통령은 이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일 관계도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15일 광복절 경축사) 대통령의 한 해 연설 중 가장 중요한 광복절 경축사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위’ 자도 꺼내지 않았다. 한-일 관계도 딱 한 줄 언급하고 지나갔다.

그래서 묻는다. 대통령은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할머니들의 고통을 공감하는지. 박 대통령은 좋고 싫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비서 출신인 이정현 의원은 새누리당 대표가 되자마자 청와대로 불러, 서민은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송로버섯, 비윤리적이어서 먹지 말아야 할 샥스핀 요리 따위를 정성껏 차려줬다. 하지만 대통령은 2013년 2월25일 취임 뒤 한 번도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모셔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한 적이 없다. 취임 전이든 후든 대통령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손 한 번 맞잡지 않고, 밥 한 끼 함께 먹지 않고 어떻게 고통을 공감하나?

12·28 합의 발표 주체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도 합의 이후 지금껏 할머니들을 만나지 않았다. 윤 장관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난 뒤에 타결이 이뤄진들 무슨 소용”(2015년 12월31일 새누리당 의원총회 보고)이냐며 “절박한 심정”(28일 <한국방송> 일요진단)을 거듭 강조해왔다. 그런데 윤 장관은 왜 합의 이후 벌써 여섯 분이 한 많은 세상을 등지셨는데도 할머니들을 만나 설명하고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려 하지 않을까? 한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반인도적 범죄”이자 “인류보편적 인권 문제”이자 “살아 있는 현재의 문제”(2014년 3월5일 제25차 유엔인권이사회 기조연설)라고 강조한 윤 장관은, 3월2일 제31차 유엔인권이사회 연설에선 위안부의 ‘위’ 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이 바라는 건 뭘까? 망각일까? 기억일까?

수인의 90%가 가스실에서 죽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시대의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는 경고했다.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247쪽) 레비는 유서나 마찬가지인 이 글을 쓴 이듬해인 1987년 4월11일 이탈리아 토리노의 자택 아파트 4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억’을 불편해하는 세상에 지쳐서.

잊고 싶은가, 당신은.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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