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외교팀장 그들은 그녀를 발가벗겼다. 치부를 가리고 싶다면, 함께 저항운동을 한 동지의 이름을 대라고 얼렀다. 수치심을 한껏 자극하는 야비한 고문. 그녀는 침묵으로 저항했다.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려 파란 비닐봉지를 구해 바지를 만들어 걸쳤다. 몇주째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총으로 쏴 죽였다. 필라 은드완드웨. 아프리카민족회의 ‘민족의 투창’ 소속 무장전사. 그녀의 주검은 가해자가 진실화해위원회에 나와 진실을 증언하기 전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진실화해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폐지되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정부가 ‘진실을 기반으로 한 과거사 청산’과 흑백이 공존하는 세상을 이루려 만든 기구다. 필라의 주검이 발견됐을 때, 그 비닐바지는 그녀의 골반에 감겨 있었다. 남아공의 화가 주디스 메이슨은 그걸 그러모아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해 ‘블루 드레스’를 만들었다. “그 비닐봉지들을 모아 이 드레스를 만들어 그대에게 바치나니 잘 가오, 투사여!” 필라의 파란 비닐바지는, 블루 드레스로 거듭나 지금 남아공 헌법재판소에 걸려 있다. 가해자의 증언이 없었다면, 필라의 죽음의 진실은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의 증언을 이끌어낸 동력은 남아공 민주정부의 “진실을 밝히는 가해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의 최초 제안자는 남아공 헌재 초대 재판관 알비 삭스. 그 또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우다 차량 폭탄 테러로 오른팔과 왼쪽 눈을 잃었다. 삭스는 회고록 <블루 드레스>에 이렇게 적었다. “사면을 부여하는 대가로 조국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남아공은 ‘진실’ 없는 ‘화해’를 거부했다. ‘진실’에 밑받침된 ‘화해’의 길을 열려고, 개별 가해자의 ‘진실 증언’을 전제로 처벌을 포기했다. 진실화해위의 이름이 ‘진실’, 그리고 ‘화해’의 순으로 작명된 이유다. 여기 네 개의 단어가 있다. 정의, 기억, 화해, 치유. 뒤의 두 단어는 7월28일 ‘화해·치유 재단’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됐다. 박근혜 정부가,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12·28 합의를 이행하겠다며 만든 재단이다. 재단 발족식 참석자 중 누구도 ‘진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일 외교장관의 12·28 합의 발표 공동기자회견 때도 ‘진실’은 거론되지 않았다. 그래서다. 앞의 두 단어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기로 한 것은. 박근혜 정부가 무작정 ‘화해·치유’를 외치자, 이들은 “아픈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겠다며 ‘정의기억재단’으로 모였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라 흔히 불리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가 ‘여성 인권을 유린한 전시 국가범죄’임을 국제사회에 알려온 공로로 2015년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받은 김복동 할머니는 ‘화해·치유 재단’이 아닌 ‘정의기억재단’의 고문을 맡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당한 사람 아니고는 아무도 모를” 일을 겪은 할머니가, “그런 줄 몰랐드만 거기 갔다 왔다네”라는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세상에 다시 나온 이유를. “내가 신고를 안 하면 저놈들 나쁜 짓 한 거 어떻게 알겠노. 말은 해야 되겠다 싶어서 신고한 건데….”(<한겨레> 2014년 2월22일치 20면) “나 죽거들랑 불에 태워서 산에 뿌려주면 훨훨 나비가 돼서 천지 세계로 날아다니고 싶어”라는 할머니의 마지막 꿈은 ‘진실’이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외주를 받아 박근혜 정부가 강요하는 ‘망각을 위한 화해’가 아니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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