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경제대 교수 숲은 되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재생의 희망을 얘기하는 말일까? 비참한 일은 잊히고 참화는 되풀이된다. 시간의 흐름은 망각의 편이다. 시간의 여신과 전쟁의 신은 서로 사이가 좋다. 예술가들은 이 무자비한 적과 승산이 별로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일전에 간다의 이와나미 홀에서 이탈리아 에르만노 올미 감독의 영화 <숲은 되살아날 것이다>(Torneranno i prati, 2014. 영어명 Greenery Will Bloom Again)를 봤다.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아 감독이 자신의 아버지가 얘기한 전쟁 체험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올미 감독의 <나막신 나무>(L’albero degli Zoccoli, 1978)를 본 적이 있다. 벌써 40년 전쯤이다. 19세기 말 북이탈리아 베르가모의 농촌을 무대로, 수확의 3분의 2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가혹한 착취 아래 살아가는 농민들의 생활이 그려져 있다. 어느 날 소년의 나막신이 망가진다. 튼튼한 신을 사줄 여유가 없는 아버지는 냇가에 무성하게 자란 포플러 나무를 잘라 새 나막신을 만들어주려 한다. 그런데 그 나무도 지주 소유물이었다. 아버지는 지주한테 야단맞고 일가는 쫓겨나 새벽에 정처없이 떠난다. 나는 충청남도 시골길을 떠올렸다.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 읊었던 1920년대, 신작로 공사에 동원된 내 외할아버지는 곡괭이를 처가 마당에 내팽개친 뒤 굶주리는 가족을 먹이기 위해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포플러와 코스모스들이 자태를 뽐내는 가난하고 아름다운 할아버지 고향을 나는 1960년대에 두 번 찾아가봤으나,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 두 형이 투옥된 뒤에는 가보지 못했다.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명작 <자전거 도둑>(1948)을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가난한 서민 생활의 애수를 묘사한 작품으로 이탈리아 리얼리즘 영화를 능가하는 게 없다. <나막신 나무>도 그 정통적 흐름을 이어받은 작품이다. 그런데 그 영상미는 매우 회화적이어서, 브뤼헐의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내게 서양 미술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올미 감독은 <숲은 되살아날 것이다>에 나오는 얘기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것들”이라고 말한다. 1917년 겨울, 이탈리아 알프스 산속의 아시아고 고원. 얼어붙은 설원, 까맣게 솟아오른 봉우리들을 달이 비추고 있다.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눈에 파묻힌 참호에서 이탈리아군 병사들이 노래하는 나폴리 민요들이 낮게 흘러나오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오스트리아군 참호 쪽에서도 “좋구먼. 좀 더 불러줘”라고 독촉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 나라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피폐해진 상태. 그러나 이탈리아군 사령부에서 “통신이 적에게 감청당하고 있으니, 새 통신선을 깔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이 내려온다. 성공 가망성이 없는 자살행위지만, 결국 병사 한 명이 설원을 포복전진해 간다. 얼마 가지 않아 땅 하는 건조한 총성이 울려퍼지고 그 병사는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짝 긴장된 순간들이 흐르다가 결국 평온은 깨어지고, 오스트리아군이 요란한 포격을 시작한다. 참호는 파괴돼 무너진다. 지휘관인 대위는 상부의 조처에 반발해 계급장을 반납하고,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중위가 어쩔 수 없이 후임자가 된다. 이 중위가 올미 감독의 아버지다. 중위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어머니, 가장 힘든 일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인가요.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많은 이들의 죽음을 부른 카르소(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국경 지역)와 피아베강(이탈리아 북부를 지나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강)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 체험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그 뒤의 인생에 큰 상흔을 남겼다. 아버지는 어린 나와 형에게 전쟁의 고뇌에 대해 곧잘 얘기했다. 참호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 돌격명령을 기다릴 때의 공포에 대해. 그리고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는지 가르쳐주려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내 생각은 자연스레 예전에 찾아갔던 북프랑스의 제1차 대전 유적지로 이어졌다. 2003년 여름, 20세기 독일 화가 오토 딕스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출연 때문에 나는 <엔에이치케이>(NHK) 촬영팀과 함께 그곳을 찾아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주변 풍경이 모두 뿌옇게 보였다. 벨기에 남부에서 북프랑스에 이르는 지역 일대에는 서부전선 격전의 상흔들이 남아 있다. 보몽아멜의 뉴펀들랜드 기념공원은 캐나다 병사 전몰자 추도시설이다. 거기에 전쟁 참호가 가장 잘 보존돼 있다. 후려갈기는 듯한 강렬한 태양에 그을리면서 나는 굽어진 참호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머리 위에는 무수한 흰 나비들이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고교 시절에 본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1930)의 마지막 장면이다. 참호 속에 웅크린 채 적군과 대치하던 병사가 문득 나비를 발견한다. 흰 나비는 팔랑팔랑 날아 병사의 시선 앞에 머문다. 병사는 나비에게 손을 뻗친다. 10센티미터, 5센티미터…. 그때 둔탁한 총성이 울리고 머리를 관통당한 병사의 팔은 힘없이 대지 위로 축 늘어진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보고 사항 없음”이라는 텔롭(방영 중에 투사, 삽입되는 문자나 그림)이 오버랩되어 흐른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원작 소설에 참호전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묘사가 나온다. “전선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몸이 마를 새가 없었다. … 지면은 누런 물이 고여 똑똑 떨어질 듯한 기름 덩어리 꼴이 됐다. 그 속에 누렇게 고인 물에 나선형의 붉은 피가 웃고 있고, 죽은 자와 부상자와 살아남은 자들은 차례차례 그 땅 속으로 잠겨 갔다. … 우리 손은 지면이다. 우리 몸은 점토다. 우리 눈은 고인 빗물이다. 우리는 도대체 살아 있는 것인가. 나도 모르겠다.” 개전 당시 23살이었던 딕스도 애국주의 열기를 공유한 채 자원입대했다. 야전 포병, 기관총병으로 서부전선에 투입돼 제1차 대전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가열된 최전선을 경험했다. “이, 쥐, 철조망, 벼룩, 유탄, 폭탄, 구멍, 시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넌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 모두 악마의 소행!” 딕스의 전장 일기에 적혀 있던 글자들이다. 전후 그 경험을 토대로 나치스의 압박에도 저항하면서 반전적 주제의 작품을 그렸다. 화가 딕스는 서부전선 참호전의 경험 속에서 태어났다.(졸저 <고뇌의 원근법>, 돌베개)
연재서경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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