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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혁웅의 오목렌즈] 연옥의 시간들

등록 2016-05-10 19:31

권혁웅 시인
권혁웅 시인
2년 걸려 시 한 편을 썼다. 제목과 첫 줄을 얻은 게 2년 전인데,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다음 줄을 얻지 못해 묵혀 두었던 시다. 몇 해 전에도 첫 줄을 쓴 뒤에 1년이 지나서 다음 줄을 쓴 적이 있다. 이번에는 1년이 더 지나갔다. 사실 2년 동안의 체험이 없었다면 다음 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저 시는 첫사랑 애인처럼 잠시 얼굴을 보여주고는 바로 숨어 버렸다. 내가 세상을 관통해서 거기에 이를 때까지 저 시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제목과 첫 줄이 있으니 세상에 없는 시가 아니지만, 제 몸을 얻지 못했으니 있지도 않은 시다. 시에도 연옥이 있었구나. 한 달 전 아기 돌잔치를 했다. 하객 중에 어린 제자가 있었다. 주말에 편의점에서 밤샘 알바를 해서 생활비를 버는 제자였다. 잔치가 끝나고 보니 축의금을 내고 갔다.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오라고 했는데 선생의 말 따위는 듣지 않는 독립군 같은 제자였다. 꼬박 5시간을 편의점 가판대에서 보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잔칫집에 와서 저녁밥 한 끼와 맞바꾼 그 다섯 시간이 뭉클하고 미안했다. 제자가 졸음과 싸워가며 보낸 그 시간 역시 연옥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얘기해주려고 아기 이름으로 개설한 통장에 넣어두었다. 아기야, 이 통장에 든 것은 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적립해둔 특별한 시간이란다. 연옥을 지나온 아름다운 마음이란다.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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