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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촌스러운 건 여전하다 / 희정

등록 2016-04-17 19:48

“세상이 변했다.” 새로 단장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은 그리 말하는 듯하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는 비정규직 문제를 노사합의했다. 언론은 11년 만의 타결이라 전했다. 불법파견 비정규직 중 2천명을 정규직으로 특별채용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현대자동차는 수만명의 파견노동자를 도급이라 속여 불법고용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됐다. 때마침 울산공장 정문도 새롭게 단장됐다. 모든 게 과거 일이 됐다.

그런데 단장한 정문에 어울리지 않은 풍경이 하나 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현수막들. 핏빛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현수막까지. 적힌 문구는 더 ‘올드’하다.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자!” “노동조합 탄압 웬 말이냐!” 세련된 정문과 현수막을 들고 선 이들 사이에 세월의 격차가 20년은 되어 보인다.

이들은 현대자동차 2차 하청업체 노동자와 촉탁직 노동자다. 촉탁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대체물이었다. 불법파견 문제가 알려지자, 현대자동차는 하청업체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신 촉탁직이라는 단기 계약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길게는 석 달, 짧게는 일주일 계약을 맺어 일했다. 하는 일은 같은데 계약서만 달라졌다. 한 사람이 2년 동안 16번의 쪼개기 계약을 맺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위법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이 나왔다. 회사 입장에선 골칫거리다. 불법파견 오명을 벗었다. 이제 빈자리는 하청업체 노동자들로 채우면 된다. 촉탁직은 더는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필요 없어진 촉탁직이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2, 3차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더 문제다. 회사는 골머리 앓던 11년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불법파견의 증거들도 이번 타결로 사라졌다. 그러니 노동조합에 가입해 불법파견 문제를 다시금 제기할 2, 3차 하청노동자들이 눈엣가시다. 그래서일까. 노동조합 가입자를 향한 탄압이 지나치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출입증 반납을 지시했다. 해고 통보다. 경비대를 동원한 폭력도 따라왔다.

과거 11년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에 과거의 방법을 사용한다. 10년 전 1차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방법. 해고와 무자비한 폭력. 현대자동차는 다소 ‘올드’한 방법을 써서라도 문제를 묻으려 한다. 어쩌면 이 또한 새 단장의 한 종류일지 모르겠다.

새 단장의 욕구는 늘 있어 왔다. 수천명 계약직을 하루아침에 자신들과 무관한 도급직으로 만든 한국통신. 이에 맞서 2년간 싸운 노동자들이 뿔뿔이 흩어질 즈음 이름을 바꾸었다. 글로벌 경영에 걸맞은 영어 이름 케이티(KT). 그 후 15년, 회장과 주주들이 배당금 잔치를 하는 동안 가혹한 구조조정을 못 이긴 직원들의 자살이 속출했다.

구로공단은 이름을 구로디지털단지로 바꿨다.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고, 컴컴한 공단은 높이 솟은 빌딩에 가려졌다. 낡은 노동도 숨겨졌다. 디지털 기기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파견업체를 거쳐야만 일을 구할 수 있다. 3개월, 6개월짜리 파견직원이 되어 공장을 떠돈다. 그들을 가려버린 고층빌딩 안에는 아이티(IT), 디자인 노동자들이 연봉제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야근수당 등 각종 권리를 빼앗기고 24시간 노동을 한다.

희정 기록노동자
희정 기록노동자
과거를 벗고 새로워지겠다고 한다. 그런데 세련된 포장지 아래 구닥다리는 여전하다. 누군가의 안정된 일자리, 정당한 대가를 빼앗아 배를 불리려는 오래된 욕구. 노동자들이 든 현수막만 촌스러운 건 아니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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