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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갈대처럼 / 후지이 다케시

등록 2016-01-24 19:02

연말 이후 매주 수요시위에 나간다. 한동안 잘 나가지 않았지만, ‘12·28 합의’ 이후 아무래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나가게 된다. 그렇지만 강추위에 떨면서 2시간가량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나는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계속 수요일마다 모이는데, 각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추위를 견디고 있는 것일까? 나만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이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수요시위에서는 매번 ‘바위처럼’이라는 노래를 튼다.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고 말하는 이 노래는 20년 이상 끈질기게 이어져온 수요시위라는 자리에는 어울리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조금 불편함을 느낀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이미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요하겠지만, 처음의 흔들림이 없었다면 어떤 운동도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역시 처음에 ‘어떤 유혹의 손길’에 흔들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뿌리가 얕은 갈대’가 아니었다면, ‘바람에 흔들’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수요시위를 비롯한 ‘위안부 문제’ 관련 운동을 ‘반일 민족주의’의 표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관점 역시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을 하나로 뭉친 바위처럼 보고 있다. 물론 실제 수요시위에서 운동의 주체를 ‘국민’이라고 말하며 마치 하나의 목소리인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제국의 위안부>같은 책에 공감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런 부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테고, 나도 그런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그 자리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내기에 ‘국민’이라는 낱말은 너무 협소하다. ‘매국’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누가 누굴 팔았는지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처럼(그래서 한일협정이 ‘매국적’이었다는 비판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라는 논리로 쉽게 반전될 수 있다), ‘국민’이라는 말은 각자의 출발점이 되는 개별적인 위치와 경험을 못 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점만으로 수요시위라는 자리를 평가하는 것도 너무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바위처럼’이라는 노래가 그 경직된 노랫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 경쾌한 멜로디에 있다. 이 노래의 내용을 듣고 있으면 불편한 마음이 들지만, 소리에 대한 몸의 반응은 다르다. 노랫말은 바위이기를 요구하고 있어도 그 멜로디는 우리를 흔들리는 갈대로 만든다. 물론 그런 몸을 다시 잡아놓기 위해 율동이라는 틀이 씌워지기도 하지만, 수요시위에서 이 노래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위라기보다는 갈대 군락을 연상시킨다. ‘바위처럼’이 지닌 대중성이 결코 그 노랫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처럼, 수요시위에 모인 사람들의 존재는 겉으로 드러난 ‘국민’과 같은 수사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실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다. 같은 바위끼리 부딪치면 아무래도 큰 바위가 이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갈대처럼 싸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고인 물이 썩듯이 흔들림 없는 운동은 죽은 운동이 되기 쉽다. 늘 흔들리고 있어야 새로워질 수 있으며, 자신을 바위라고 믿고 있는 이들을 갈대로 변하게 만들 수도 있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는 깨질 수 있지만 흔들리는 갈대는 오히려 꺾이지 않는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흔들림을 숨기려 할 때 사람은 고독해진다. 굳세게 선 바위는 늘 혼자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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