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싸고 감사원 감사 청구, 검찰 고발 등 어처구니없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아이, 마음 놓고 낳으십시오, 제가 키워드리겠습니다”라고 했고,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은 “0세부터 5세 보육은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일과 양육 양립 문제로 출산을 기피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상황을,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저출산과 인구절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다행히 보육이 국가의 중대사라는 점에서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듯한데, 돌봄에 무지한 아버지들이 주도한 탓인지 크게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육교사들은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아동학대 문제가 불거지자 ‘폐회로텔레비전(CCTV) 전면적 설치’라는 법 통과로 문제를 일단락 짓는 행태를 보면서 불안했는데 그 기본 예산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니 역시나 그런 모양이다.
‘0~5세 보육’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다. 제대로 그 세대를 키우기 시작한다면 사회 전반에 걸친 근원적 변화를 끌어낼 사안이다.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가 넘으면 자아실현을 하려는 개인들이 출현하는데 육아 부담이 너무 커지면 자연스럽게 출산 파업이 시작된다. 2만달러가 넘을 즈음에는 시장이 국가권력과 맞먹을 만큼 거대해지고 사회는 급격한 발전의 부작용에 따른 문제들을 떠안게 된다. 환경 문제, 가족해체, 인플레, 고실업, 저출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점에서 국가는 더 이상 ‘경제 성장’이 아니라 국민들의 ‘포괄적 잠재력’을 키우는데 주력해야 한다. 무수한 문제를 풀어낼 창의적 인재를 키워야 하고 적대의 현실을 협상으로 평화롭게 풀어낼 인재를 키워야 한다. 사회구성원들의 성장/성숙에 집중하면서 신뢰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 전환의 시기에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다. 교육부는 정규직 취업률로 대학을 서열화시켜 시대에 역행하고 있고, 대부분의 대학은 교육부 지원을 받아내기에 급급해하면서 시대문제를 풀어낼 인재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시장은 자동화와 정보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 더욱 빨리 일자리를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연애도 결혼도 포기하는 청년들이 양산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암울한 기운이 깊어지는데 이런 시점에서도 여전히 “굳건한 안보 위에 다시 뛰는 한국경제”를 외치는 것을 보면 지금 시대를 주도하는 이들은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는 무책임한 ‘아버지’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근대 국가의 실패는 글로벌한 현상이다.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라는 개념 아래 시장에 의해 축소된 ‘사회’를 소생시켜내기 위한 시도는 북유럽을 위시해서 여러 곳에서 일어왔다. 국가가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민들과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국가의 지원 없이 공동육아운동이 일어왔고 최근의 마을 공동체,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창의 허브 등은 지자체와 손을 잡고 가는 중이다. 아동학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시티브이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협동적이고 호혜적인 부모와 시민들과 함께 돌봄과 소통, 공존과 환대가 이루어지는 시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국가는 그것에 제대로 지원을 하면 된다. 그간 말없이 아이들을 돌보아온 국민들은 토건업자들과 다르다. 국가는 ‘토건사업’에 익숙해진 관행에서 벗어나 이 ‘어머니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들의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낼 차비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오늘 대통령 담화가 있다는데 보육 대란에 대해 어떤 언급을 할지 궁금하다. 엄마들의 마음을 졸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이 소동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0~5세 보육’을 시작으로 교육계 전반에 변화를 끌어낼 백년대계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실까? 문제가 되고 있는 예산은 국가 비상금을 풀어서 해결하겠다고 하면 안 될까? 그녀가 ‘명예남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훌륭한’ 어머니의 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 기회에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한혜정·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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