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강남역에 ‘너는 나다’ 포스트잇을 붙이러 나온 행렬, ‘#영화계_내_성폭력', ‘#문단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등 국내외에서 일고 있는 ‘미투 운동’, 시대의 증언자 최영미 시인과 권인숙 교수와 ‘미 퍼스트’ 운동을 제안한 문유식 판사 등이 만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아버지는 늘 궁금해하셨다. 남자들만 모이는 술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맞장구를 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걱정하셨다. 걱정 마시라 했다. 돈과 권력과 거리가 먼 인문계통이라 그런지, ‘서구적 신사’가 되고 싶은 분들이어서 그랬는지, 또는 열혈 페미니스트로 알려져서인지 별일 없이 잘 지냈다.
대학 학부 때 참새 떼처럼 상대 건물 앞에 모여 지나가는 여학생 품평회를 하는 남학생들을 보았다. 종아리를 힐긋거리는 눈초리가 불쾌했지만 ‘저들은 곧 도태될 테니까’ 하며 넘어갔다. 가족법 개정 운동으로 분주할 때 아버지는 또 한 번 말을 꺼내셨다. “반대하는 국회의원들 뒷조사를 하는 것이 한결 효과 있을 거다. 뒷조사하고 발표한다고 하면 금방 입장을 바꿀 거다….” 나는 그 작전은 야비한 짓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통과도 중요하지만 이 운동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를 인식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세상은 날로 좋아지고 있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은 곧 도태될 거니까….
그들은 도태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세를 늘려서 말이다.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인 장례식장에도 그들이 나타났다. ‘서 검사의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장관은 여자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중앙에 자리잡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모여든다. 수행 검사(주인공)가 장관 옆에 앉았고 부하 직원 한 명이 여자에게 그 옆에 앉으라고 팔꿈치를 민다. 수행 검사는 여자 쪽으로 몸을 기대고 추근댄다. 옆에 있던 장관이 웃으며 말한다. “내가 이놈을 수행하고 다니는지, 이놈이 나를 수행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허허허.” 검은 양복을 입은 모두가 장관을 따라 웃는다. 그놈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고 있는데 장관과 주변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듯 웃고 떠든다. 갑자기 투명인간이 된 듯한 여자는 환각을 보는 듯하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가?
주인공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떤 권력을 가진 망나니쯤 될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망나니도 귀엽게 봐주자는 인생철학을 가진, 실은 은근히 대리만족하는 보스가 있을 것이고 재빨리 자리 배치를 점검하는 조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수의 관객이 호기심으로, 분위기 깰까 봐, 떠나면 불이익을 당할까 봐 그 자리에 머문다.
이 자리는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팔아 권력을 쥔 자들이 벌였던 술판, 유신 시대 비밀 안가와 기생관광 판이 진화한 자리다. 자신의 약함과 부끄러움을 자국 여성들을 ‘식민화’하고 괴롭히면서 풀었던 전통을 심화시킨 버전이다. 외국에서 온 합리적인 비즈니스맨들은 그 자리에 갔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국을 떠났고, 망나니 과에 속하는 자들은 ‘남자의 천국’을 만났다면서 한국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그곳은 결탁과 비리의 온상이었고 고위직의 식견이 정해지는 자리였으며 한국 글로벌 네트워크의 수준을 정하는 자리였다. 또 이 땅에 ‘저녁이 있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합리성이 자리잡지 못하게 만든 자리다.
김영란법이 통과되고 공식 술판은 줄어들었다. 술이 덜 깬 자들은 여전히 자리 분간 못 하고 아무 데서나 추태의 장면을 연출하려 들지만 흥행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검사의 등장으로 ‘퍼펙트 스톰’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6년 5월17일 강남역에 ‘너는 나다’ 포스트잇을 붙이러 나온 행렬, ‘#영화계_내_성폭력’, ‘#문단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등 국내외에서 일고 있는 ‘미투 운동’, 시대의 증언자 최영미 시인과 권인숙 교수와 ‘미 퍼스트’ 운동을 제안한 문유석 판사 등이 만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1994년 서울대 신 교수 조교 성희롱 사건을 시작으로 경고가 나간 지도 오래다. ‘시민의 정부’는 성폭력 적폐청산 위원회를 꾸리고 제대로 현황 파악을 해내리라 믿는다. 포르노 영화의 주인공과 공범자들은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 깊이 반성하며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공모와 왕따의 문화를 바꾸어내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그 장면에 무감했던 이들도 실은 공범이다.
그래서 당부 하나. 온라인 플레이밍(감정을 불같이 상승시키는) 효과를 조심하고 ‘가능한 한’ 둘러앉아 ‘의논하며’ 지혜롭게 나아가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의로운 우애’의 세상임을 잊지 말기를!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