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나 광장, 공원 같은 공공장소를 단지 부동산 개념으로 다룬다면 정부가 마음껏 소유권을 누릴 수 있다. 내 집 마당에서 떠드는 사람을 내쫓을 권한이 있듯이 정부는 도로나 광장에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단속할 수 있게 된다. 미국에서도 백년 전쯤에는 그런 생각이 통용됐다. 1894년 보스턴시 공원에서 설교하던 목사가 ‘허가 없이 공공장소에서 연설한 죄’로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일대 혁신을 겪었다. 1939년 미국 노총인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가 뉴저지주 저지시에서 노동법 관련 집회를 열려다 해산당했다. 경찰은 허가받지 않은 집회라며 참가자들을 시 경계선 밖으로 몰아내고 뉴욕행 배에 강제로 태워 보냈다. 연방대법원은 이를 위헌으로 선언하면서 부동산 개념을 뛰어넘는 공공장소의 본질을 설파했다. “길과 공원은 그 형식적 소유주가 누구든 태곳적부터 공공의 용도에 바쳐진 공간이며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이고 생각을 나누고 공공의 관심사를 표현하는 장소로 쓰여왔다. 길과 공원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미국 시민의 특권이다.” 따라서 정부는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을 때 최소한으로만 이 특권을 규제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정부의 입맛에 따라 허·불허를 결정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런 원칙은 집회·시위의 자유와 허가제 금지를 규정한 우리 헌법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도로와 광장은 인색한 땅주인 같은 정부가 꽉 움켜쥔 형국이다. 우선 경찰의 사전 금지 권한이 너무 커 허가제와 다름이 없다. 경찰은 지난달 5일 서울광장 집회를 ‘폭력이 우려된다’며 금지했는데, 이렇게 자의적인 판단으로 집회·시위를 금지할 수 있는 제도는 미국 같으면 위헌이다. 1990년 백인우월주의 단체 큐클럭스클랜(KKK)이 자신들의 발원지인 테네시주 펄래스키시에서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탄생 기념일에 맞춰 홈커밍데이 행진을 열겠다고 신청했다. 시 정부는 킹 목사 추모 인파와 충돌할 것을 우려해 불허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시정부가 폭력사태 가능성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소지가 있는 것만으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킹 목사가 흑인 인권을 위해 ‘셀마 행진’을 할 때도 폭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행진을 금지하는 핑계 거리가 되지 못했다. 오늘날 큐클럭스클랜의 행진 역시 그렇다. 정부의 임무는 시민의 목소리를 막는 게 아니라 그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주변 질서를 관리해주는 데 있다.”
청와대와 국회 가까이에서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것도 원칙에 맞지 않는다. 이런 곳이야말로 공공의 관심사에 관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장소다. 미국 백악관이나 영국 총리공관 앞에서 자유롭게 시위가 열리는 이유다. 외국 대사관 근처도 마찬가지다. 현행법도 ‘대규모 집회·시위로 확산돼 대사관의 기능이나 안녕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때’만 금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그런 성격일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경찰이 마치 금지 대상인데도 지금껏 눈감아준 것처럼 말하는 것은 괘씸하다. 여기서도 합법·불법에 대한 경찰의 자의적 판단이 남용되고 있다.
소녀상 철거 논란도 소녀가 앉아 있는 그곳의 주인이 누구냐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 거리는 애초 정부가 땅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국민이 절실한 목소리를 토해낼 수 있는 공공의 토론장이다. 거기에서 소녀는 할머니들을 대신해 1인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녀와 한국 시민은 그곳을 그렇게 사용할 특권이 있다. 태곳적부터 그런 곳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래야 한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박용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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