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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말의 토착화 / 김하수

등록 2015-11-01 18:53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한때 ‘양담배’가 문제된 적이 있었다. 전매제품인 국산 담배 소비를 방해하는 불법 상품이었다. 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왔다. 전문 단속반이 있었고, 다방 같은 데서 몰래 단골한테만 팔기도 했다. 이름은 서양에서 왔다는 ‘양-’이라는 접두사를 붙이고 있었지만 사실상 모두 미제 담배였다. 미국은 곧 서양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게에서 합법적으로 외국 담배들을 판다. 그것도 미국 것만이 아니라 다양하다. 그러면서 어느새 ‘양담배’라는 말을 듣기 어려워졌다. 자유스러워지면서 동시에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다. 담배 종류를 일컫는 말도 달라졌다. 미국 담배, 일본 담배, 독일 담배처럼 생산한 나라를 일컫지 않고 구체적인 상표를 말하게 되었다. 제품의 국적보다 개별화된 상호와 상품명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양-’이라는 접두사가 사실상 무의미해진 말도 대단히 많다. ‘양복, 양파, 양말, 양옥, 양배추, 양철’ 등의 어휘도 이 이상 서양에서 왔다는 표지가 무의미해졌다. 마치 우리 토산품인 양 수입품은 보기 어렵고 국내산이 자연스럽게 잘 소비된다. 실물이 토착화되면서 말도 토착화되어 버렸다.

원래 의미가 남아 있는 ‘양’자 돌림은 ‘양주’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양주의 의미도 이미 서양 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서양의 ‘와인, 보드카, 코냑’ 등이 아닌 위스키를 주로 가리킨다. 그만큼 의미의 폭이 좁아져버렸다. 그러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점점 ‘서양’이라는 거대 관념이 상품 세계 속에서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서양 세계’와 ‘우리 세계’가 동질화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한다면 실체는 지구화되고 있고, 기호는 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세계화라는 물결에 놀라 외국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세계가 다양한 문물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문물을 자유롭게 우리 것으로 만드는 역할은 우리의 언어가 담당해야 할 일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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