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는 짧은 말 한마디는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의학적으로는 ‘순환계를 도는 붉은 액체’를 뜻하지만, ‘나의 핏줄’이라고 하면 혈연관계를 나타내며, “피를 토하다”, “피눈물을 흘리다”와 같은 구절이나 ‘피비린내, 피투성이’ 같은 말들은 고통이나 처참함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한자말로도 ‘혈관, 혈압’ 등의 의학 용어가 있고, ‘혈육, 혈통’ 같은 친족 용어도 있다. 또 ‘혈투, 유혈낭자’ 같은 호전적 표현, 그리고 ‘혈기, 혈색’과 같이 기운이나 활기를 보여주는 말도 있다. 의학 용어를 제외하면 무척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이러한 의미 기능이 바람직하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혈세’라는 말은 조어법으로는 마치 ‘피에 붙이는 세금’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피 같은 돈’을 세금으로 냈으니 ‘피처럼 아까운 세금’이라는 뜻이다. 맥락 속에서 아껴 쓰고 조심해야 할 돈이라는 윤리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세금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결국 혈세라는 말은 세금이라는 말을 감성화시킨다. 그래서 주로 상대 정파의 예산 집행을 공격하는 흥분제로 쓰인다. 그러나 세금은 감성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매우 냉정하고 실리적으로 논의해야 할 대상이다. 혈세라는 말은 냉정한 계산을 해야 할 쟁점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칫 간단한 선동에도 넘어가기 쉽다.
비슷한 경우에 ‘혈맹’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맹세를 하면서 피를 찍어 바르는 것을 뜻했지만 지금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굳은 동맹’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개의 동맹은 깨어졌다. 마치 동맹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만 하다. 그러한 동맹에 핏빛을 물들여 가며 감성적인 선동의 단어를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보통 동맹이라고 말하며 서로의 이익이 언제까지 유효한지를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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