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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혁웅의 오목렌즈] 운수 좋은 날

등록 2015-10-11 18:41

권혁웅 시인
권혁웅 시인
연이은 특강, 심사, 원고 때문에 요 며칠 바빴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 아니, 동가식서가숙인가? 병든 아내가 설렁탕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김첨지가 겪은 그날처럼 ‘괴상하게도 운수가 좋은’ 요즘이다. 오늘도 특강이 있어 안성에 다녀왔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버스를 탔을 때엔 제법 어둑어둑했다. 운전석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집으로 전화를 거니 옆에 있던 아기를 바꿔준다고 난리다. “아인아, 인사해. 아빠야.” 인사는 무슨. 아직 말도 못하는데. “안 되겠다. 화상통화하자.”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에 전화를 바꿔 걸었다. 그런데 아뿔싸, 실내가 너무 어두웠다. 아기 얼굴은 환하게 보이는데 아빠 얼굴이 캄캄했다. <운수 좋은 날> 흉내를 내며 울부짖었다. “화상통화를 걸었는데 왜 보지를 못하니?” 순간, 버스 안이 환해졌다. 기사분이 우리 대화를 엿듣고는 슬쩍 실내등을 켠 거다. 아차, 여기 버스 안이었지. 그런데 아기가 아빠를 알아보고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 아빠가 호응하며 웃는 소리, 엄마가 추임새 넣으며 웃는 소리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전화를 끊으며 미안해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좌석은 어둠에 잠겨 있는데 통로 쪽 실내등은 줄줄이 빛나고 있었다. 빛의 동굴이 어둠을 뚫고 깊이 패어 있었다.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구나. 나는 블랙홀 너머에 있다는 화이트홀을 방금 목격했다.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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