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즐기던 대학 시절에는 나도 제법 논객이었는데, 한번은 동기 여학생과의 논쟁에서 무참하게 깨졌다. 그녀의 혀 짧은 소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거다. 뭐라는지 알아들어야 반박을 하지. 외국인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느끼는 바로 그 철벽이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미군의 암호를 여러 차례 풀자, 미군은 나바호족 인디언들을 고용해서 정보를 주고받았다. 일본인들은 목을 울리는 괴상한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바호족 암호병이야말로 미국의 비밀병기였던 셈이다. 두 경우 모두 승리의 비결은 이것이다. 쟤는 모르고 나는 알고.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대통령의 화법도 어쩌면 이런 전략이 아닐까. 이 화법으로 대화하면 당연히 불통이 생겨난다. 그 반대는 좋을까? 전임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대국민 담화에서 그는 이 문제가 홍보 부족과 소통 부재 때문이었다고 진단했다. 그가 구사한 문맥에서 ‘홍보’와 ‘소통’은 동의어다. 소통이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는 말인데, 그는 이 상호성을 가볍게 무시하고 일방통행로를 소통이라 주장한다. 내가 말하는 것만 들어. 너는 닥치고. 이런 소통으로 인간과 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 건너온 소라면 몰라도. 나와 일본군의 패배가 웅변하듯 제대로 소통하려면 먼저 들어야 한다. 휴, 그때는 목쉰 스피커만큼 피곤한 게 또 있을까 싶었더랬다.
권혁웅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