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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언어로 성형수술을 / 김하수

등록 2015-07-05 19:01

오래전에는 지금의 간호사에 대한 호칭이 간호부였다. 주로 양성소에서 길러냈다. 나중에 간호대학이 생기면서 대우도 달라졌고 이름도 간호원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더 발전되어 대학원도 생겨 학위도 받게 되자 스스로 간호사라는 명칭을 썼다. 직업 범주의 발전과 이에 따른 명칭의 변화가 함께 한 것이다. 이름으로만 본다면 의사, 약사와 함께 보건 의료 활동을 주도하는 전문가의 세 가지 주류 직업에 제대로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

좀 다른 경우는 가사 보조원에 대한 경우이다. 오래전에는 식모라는 이름으로 매우 종속적인 직업이었다. 월급도 없이 먹이고 재워주고 나중에 결혼시켜 주고 끝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 이후 가정부로, 또 가사도우미로 이름을 바꾸면서 처음의 종속성은 탈피하고 독자적인 직업 범주를 형성해내게 되었다.

또 다른 직업군을 보자. 역시 오래전에는 직업으로 차량 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운전수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언젠가 운전사로 바뀌었고, 또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기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직업으로서의 지위나 대우가 좋아졌다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름만 바뀐 것 같다.

어휘의 변화는 형태의 변화에 걸맞은 의미의 변화도 필요하다. 의미는 그저 그대로인데 허울만 그럴듯해진 것은 그만큼 내실이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 청소부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그들의 삶은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 변함없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 저임금, 과잉 노동 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직업의 명칭이 더 나은 모습으로 듣기 좋게 바뀌어 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내용, 곧 의미의 발전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어휘의 겉모습만 바꾸는 성형 수술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의 변화가 없이 말 껍데기만 슬쩍 바꾸는 포장술로는 사회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사회적 위선, 아니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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