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각종 폭력 사건들이 뉴스를 채운다. 연달아 알려지고 있는 비극적인 군대 안에서의 폭력 및 사망 사건들이 대표적이다. 벌써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는 잊혔겠지만, 바로 올해에도 여러 건 학교 체벌로 학생이 사망하거나 고통받은 사건들이 있었다. 법적으로는 학교 체벌이 금지되어 있으나, 체벌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여러 ‘아동 학대’ 사건들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학에서의 기합주기와 구타, 일터에서의 폭력까지, 사건이 없는 때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동안은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묻히던 사건들이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폭력 문화의 뿌리가 군대인지 학교인지 다른 어딘지는 딱 짚기 어렵겠으나, 나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맞을 만한 짓’이 있다고 학습하는 것을 폭력이 반복되는 원인으로 꼽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맞을 만했을 것’이라며 폭력을 옹호한다. 얼마 전 유도선수 왕기춘씨는 대학 유도부의 체벌 사건에 대해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 “욕하기 전에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가 특별히 폭력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그 비슷한 말들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체벌을 당한 건 학생이 먼저 잘못을 해서 그런 거라고 하고, 군대에서 폭행당한 군인은 그 사람이 적응을 못했거나 소위 ‘관심병사’였을 거라고 한다. 법원마저도 자녀를 폭행하여 죽게 한 부모에 대해서, 자녀가 가출을 해서 설득과 훈육을 하는 과정에서 있던 일이라며 처벌을 경감해준 적이 있다.
이처럼 관대하게도 ‘맞을 만했을 것’이라며 폭력을 용인하는 태도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노출이나 행실을 탓하는 것과도 닮아 있으며, 사실상 2차 가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이런 논리는 정당화되는 폭력들의 피해자가 언제나 권력관계에서 약자라는 것은 외면한다. 예컨대 숙제를 안 해온 학생은 교사에게 체벌을 당하지만, 수업 준비를 안 해온 교사는 학생에게 체벌을 당하지 않는다. 후임병은 폭행의 대상이 되지만 선임병이나 장교가 폭행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폭력들이 ‘맞을 만한 짓을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릴 수 있는 상대이고, 때려도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신체적 고통과 상해를 가하는 폭력은 존재 자체에 대한 폭력이고 위협일 수밖에 없다. 내 몸이 곧 나이고 내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태형 등을 반인권적이라고 금지하는 이유다. 누구든 잘못을 했으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 방식이 신체적 폭력이어선 안 된다. 인간의 존재를 해치는 명백한 폭력은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폭력에서 비롯되는 비극적인 사건들 역시 근절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의 정도를 따지기 전에 원칙적으로 폭력의 정당화를 거부해야 한다.
세상에 맞을 만한 일은 없다. ‘맞을 만했는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이 부당하며 비인간적임을 확인할 때, 우리는 비로소 폭력을 없앨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것일 터이다. 군 인권 대책도 필요하고 각 영역에서의 대책들도 필요하지만, 나는 동시에 사실상 공인되고 있는 가정·학교·학원 등에서의 청소년에 대한 폭력부터 완전히 금지할 것을 제안한다. ‘맞을 만한 일’도 없고, ‘맞을 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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