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 기록노동자
이 땅을 왕이 지배하던 시기, 수탈과 부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컸다. 죽어라 일을 해도 백성의 의무라며 노임은 나오지 않았다. 단기 부역일 경우 끼니마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성곽을 쌓고 저수지를 파는 데만 백성들이 차출된 것이 아니다. 왕이 사냥을 나가면 사냥터가 될 땅의 풀을 베어야 했고, 왕족 행차에는 군병 모습을 하고 동원됐다. 왕의 장례 길목에 엎드려 통곡을 하는 것도 부역의 일부였다.
고된 노동에 농민들이 도망치면 그 자리를 승려들로 채웠다는 기록, 둑 쌓는 부역에 나오지 않은 이의 자식을 둑 속에 산 채로 묻어 벌을 가했다는 민담은 당시 백성의 고통을 말해준다. 권력자가 사적인 일에 부역민을 동원해 사욕을 채우고, 농사철을 고려하지 않고 강제노동을 명하는 것은 제재를 가하지 않아도 백성이 부역에 참가하지 않거나 도망치는 일은 엄중처벌 했다.
백성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왔다. 그러나 윤 일병 사망 등 일련의 군대 폭력 사건을 보며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이리 말하는 이들 때문이다. “우리 때는 더 심해도 다들 잘 살았는데, 요즘 애들은 너무 곱게만 자라서 그래.”
상상해본다. 이웃의 자식이 둑 안에 파묻혀 죽고, 고향 논에는 수확을 못 한 벼이삭이 말라비틀어지고, 고된 노동 끝에 주어지는 것은 고작 주먹밥 두어 개인 노역장에서 도망친 이들의 뒤에 대고 “우리 때는 더한 것도 참았는데, 나약하기는…”이라고 말하는 왕의 백성들을.
젊은 시절 레지스탕스였다는 아흔의 노인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고 외쳤다. ‘분노할 의무’를 강조한 그의 연설은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동의를 얻어냈다. 분노하라! 그의 연설을 옮긴 책은 한국에서도 유행했다. 의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는 대중에게 화를 내고 실망을 했다.
분노할 만한 사회다. 300여명이 수장된 사건이 일어나도 누구 하나 올곧게 책임지지 않았다. 유병언 시신을 둘러싼 진실공방을 넘어 그 아들이 시킨 배달음식이 뉴스에 연일 나오는 사회. 기소권과 수사권을 갖춘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단 하나의 요구를 위해 딸을 바다에 묻은 아비가 30일 넘게 단식을 해야 하는, 끔찍하고 무서운 사회다.
그러니 말이다. 이렇게 무서운 사회에서 분노는 해서 뭐할 건데. 분노해서 부역에 나가지 않으면 내 자식을 둑 속에 묻어 버리는 사회에서, 내 아들이 맞아 죽어도 사건이 숨겨지고 숨겨지다 결국 육군참모총장이 책임졌으면 다 된 것 아닌가 하는 소리나 듣는 사회에서, 자식 잃은 유가족이 경찰에게 폭행마저 당하는 사회에서, 분노를 해봤자 무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 때는 더했어” “세상이 그렇지 뭐”라고 외면하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한 일이 아닌가. 개인이 분노할 수 없는 사회에서 분노하라 외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 아닐까.
분노가 깊어 분노할 수 없는 사회에서, 그럼에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이 물음이다.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평범한 이들이 왕의 백성이었던 시절, 많게는 한해 일흔 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분노하고 저항코자 한 이들이 있었다.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자유와 권리가 우리 손에 있다고 배워온, 더 이상 왕의 백성이 아닌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와 권리는, 아니 그리할 힘은 어디에 있는가.
희정 기록노동자
세월호 십자가 순례 마친 웅기 아빠 “약속되지 않은 이별에서 오는 고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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