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기원전 399년의 어느 봄날, 고대 그리스가 쇠망한 원인으로 꼽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지 5년 후쯤의 일이었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신을 모독한 언행 탓으로 3인의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고소당했다. 11인의 재판관들은 젊은이들에게 불경하고 왜곡된 시선을 심어주었단 이유로 그를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매일같이 감옥을 방문해 그를 탈출시키고자 설득했다. 당시 그들 중에는 28살 혹은 29살로 추정되는 젊은 플라톤이 속해 있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저서들 중에 <크리톤>과 <파이돈>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즉, 플라톤에게 <파이돈>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일렀던 ‘영혼의 불멸에 대한 징표’라 할 수 있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신고전주의의 명작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위의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다비드가 그림을 그린 것은 1787년으로, 그의 나이 39살 때였다. 여느 다비드의 작품들처럼 이 회화도 고전적 취향에 따른 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구도적 균형감을 지녔으며, 한눈에도 지적인 설계구조에 의해 ‘이성과 열정의 조화로움’을 내비친 그림으로 완성됐다. 그림의 중앙에는 독약을 마실 순간이 왔지만 여전히 강경한 소크라테스가 침대에 앉아 있다. 탈출을 조언하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그는 독약을 받아서 든다. 불의의 극단적 상황에서조차 “도시의 법률에 충실해야 한다”는 신념을 외치면서 말이다. 신고전적 기법 안에서 화가는 실제와 작품의 이해관계들을 한데 묶어서 표현했다. 작품 속 소크라테스의 손가락 끝은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침대의 가장자리에는 노인이 된 플라톤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몇몇 고서들은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마신 순간에 플라톤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비드는 플라톤을 새겨 넣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도 실제와는 다르다. 재현보다는 주제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스승과 제자 간의 관념적 관계인 ‘지적 인내’에 빠져들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취한 동작의 원류를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에서 따왔다. 이 프레스코화 속의 소크라테스 모습은 ‘천상의 지혜’를 더 중히 여기는 플라톤의 형태와 동일하다. ‘지상의 지혜’를 대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은 다비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를 접한 후 밀려온 심적인 혼란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현실 세계의 차갑고도 단단한 벽 앞에서, 국민의 마음은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득한 참사의 순간에, 주요 선박직 승무원들은 승객보다 먼저 탈출을 시도했다고 한다. 국가가 지닌 위기상황에서의 원칙 부재가 표면으로 드러났으며, 원칙을 저버린 선원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기표를 느껴서 참담하다. 여객선 침몰 희생자의 발인 소식이 하나둘씩 들려온다. 모니터에 비친 젊은 여교사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소크라테스의 믿음을 되새기게 된다. 플라톤이 일렀던 ‘영혼의 불멸에 대한 제자들과의 대화’ 또한 그 사진 속에 반사되어 비친다. 정의를 구분하는 일은 항상 어렵다. 그렇지만 발아래의 암흑의 구덩이 속에서 정의의 예시들을 발견하게 된다. ‘권력 혹은 존경’이 행복의 지표라고 외치는 폴루스를 향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선한 일을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외침을 가슴에 새겨야 할 시기이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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