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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코앞에서 멈춘 주먹질 / 이재성

등록 2014-02-23 18:48수정 2014-02-24 14:06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이석기 의원 등의 ‘5월 모임’ 녹취록을 다시 읽었다. 수백군데에 이르는 국정원의 고의적 ‘오류’를 고려하고 읽어서인지, 그동안 여기저기서 많이 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읽었을 때보단 충격이 덜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정신상태가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이석기 의원은 통합진보당을 장악하고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는 우쭐한 기분에 젖어 과도한 정세인식의 오류에 빠진 상태에서,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당원들을 다잡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들이 얘기하는 통신시설이나 유류시설의 위치, 장난감 권총 개조 등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커녕 자기과시적 아이디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의원 등의 행위가 내란음모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인지, 구체적인 실행 의지와 계획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1심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소개한 형법상 음모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1999.11.12)도 그렇게 밝히고 있다. “단순히 범죄결심을 외부에 표시·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객관적으로 보아 특정한 범죄의 실행을 위한 준비행위라는 것이 명백히 인식되고, 그 합의에 실질적인 위험성이 인정될 때에 비로소 음모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비록 그 음모가 계획의 세부에까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인 위험성이 상당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총책(이석기)의 실행의지와 수령관에 기초한 조직원들의 충실성, 적어도 2개월에 걸친 사전준비와 혁명적 결의의 강화과정, 모의에서 밝혀진 구체적인 폭동의 윤곽 등”을 들었다.

이 판결에 대한 가장 중대한 반론은 이 의원 등이 “특정 범죄의 실행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행위도 한 적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은 그저 모여서 말을 했을 뿐이다. 말에 따른 행동도, 행동을 위한 계획이나 지침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으로 중요한 대목이 “적어도 2개월에 걸친 사전준비”다. 재판부가 보기에, 혜화동 통신시설이나 평택 유류기지 등의 위치와 경비 상태 등에 대한 얘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사전 조사와 준비에 따른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 어디를 찾아봐도 사전 조사와 준비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설사 사전 조사와 준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게 있다’ 정도의 정보를 보고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형법의 음모죄에 대한 앞의 대법원 판례에도 적용되고 있는 ‘명백·현존 위험의 원칙’을 확립한 사람은 미국의 연방 대법관 올리버 웬들 홈스(1841~1935)다. 이 원칙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한’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홈스 대법관은 또 개인의 자유를 “주먹을 마음껏 휘두르되 다른 사람의 코앞에서 딱 멈춰야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석기 의원 등의 행위는 코앞에서 멈췄다. 재판부가 인정했듯이 정세의 변화 탓인지 구체적 모의도 없었다. 이들에게 내란음모죄를 적용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경우는 어떤가. 대선을 사흘 앞둔 밤 11시에 거짓 수사 결과를 발표해 선거에 영향을 끼친 행위는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을 금지한 우리 헌법의 코를 세게 친 것이다. 음모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범죄를 실행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아쉽다’는 비법률적 용어로 무죄를 선고했다.

광기에 가까운 박근혜 정부의 공안통치와 검찰 장악 기도가 이석기·김용판 재판부를 주눅들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최근 재심 판결을 쏟아내고 있는 사법부가 더이상 유신시대처럼 뉘우쳐야 할 과거를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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