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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잡히면 전향하십시오

등록 2013-12-20 19:54수정 2013-12-23 15:13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조국-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하>
김진계 구술·기록, 김응교 보고문학, 현장문학사, 1990
‘올해의 단어’를 꼽는다면 ‘종북’이 아닐까. 이런 말이 번성하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종북은 국가가 만든 말이 아니다. 어떤 ‘진보’가 어떤 ‘진보’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세 가지 의미에서 비극이다. 첫번째는 앞에 썼고 두번째는 남한의 북한관이 기존의 반공에서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우월감으로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점에서다. 이전에 북한이나 친북은 국가 전복 세력이었으나 지금의 종북은 ‘봉건사회’, ‘시대착오’, ‘세계에 창피한 반쪽’이라는 사회적 합의에서 작동하고 있다. 집단적 우월감은 반공보다 더 위험하다.

마지막으로 종북은 북한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북한에는 어린이도 있고, 정권도 있고, 산과 강, 나무와 물고기도 있다. “택시요금 2만원” 거리의 개성공단도 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찬양, 고무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나는 종북이다.

종북은 북한 내부를 균질적인 동일 집단으로 만들어 다른 차원의 접근과 개입을 가로막는 언어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정권과 인민을 구분해야 하고, 그래야 북한 인권 운동 지원이 반공 담론으로 흡수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종북은 이 절박한 실천을 차단하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종미(從美)보다 사대라는 말이 올바르다. 친미사대주의자라도 미국의 노숙인이나 마약 중독자를 따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국민윤리(국민의/으로서 윤리라니!) 교과서와 정반대의 북한을 접한 후, 나는 일관된 북한관을 갖게 되었다. 한때 활발했던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앎’이 아니라 어느 방향이든 아는 과정에 대한 불신이었다. 너무 놀라면 아는 상태도 모르는 상태도 두려운 법이다. 지식이 생산된 전후 관계를 모두 파악해야 하는 노력(勞力)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누구도 믿지 않는다. 방북 경험자들의 이야기, 탈북자 인터뷰, 국내외 책들… 모두 믿지 않는다. 나 자신을 일시적 판단 중지(에포케, epoche) 상태에 묶어두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내 몸 크기의 수백 배 되는 코끼리를 더듬고 있는 기분이다. 북한, 남북 관계에 대한 이해는 인식론적 도전이자 새로운 방법론을 요구한다.

이 책은 남파된 지 일주일 만에 체포되어 18년 동안 수형 생활을 한 장기수 김진계의 이야기다. 세밀하고 ‘객관적인’ 묘사가 인상적인 소중한 현대사 자료이다. 읽은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자주 생각난다. 시비(是非)와 사실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은 상식적이다’라는 상식으로 사는 자세를 바로잡게 해준다.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 세상물정 모르던 20대 초반에 읽어서 그런지 당시 남한 교도소에 관한 묘사, 특히 소년범들에 대한 성폭력 부분은 충격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북한에서 받은 교육 내용을 기술한 대목이다. 1970년 9월29일, 북한의 ‘남조선 총국장’ 김중린은 마지막 교육을 마치고 남한으로 떠나는 동지(김진계)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한다.(하권, 196~199쪽, 맞춤법은 책 표기 그대로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당에서는 공작사업에 대해 재검토 중입니다. 내려가 봐야 잡히기만 하고… 아마 선생님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다른 말씀은 없구 늘 그렇듯 안전하게 돌아와야 합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그리고 꼬옥 부탁인데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자결 같은 건 생각하지 마십시오. 살아있어야 사업도 있고 고생도 낙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최후를 끝내려는 짓은 절대 삼가야 합니다. 잘 아시죠? 선생님.

그리고 만약 적의 손에 들어가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일개인의 절개를 지킨다구 전향을 거부하여 수십 년째 고생하다가 목숨을 잃는 동무도 있다고 하는데… 마음 아픕니다. 솔직히 우리 당에서는 전향에 무관심합니다. 물론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하는 거지만… 전향하구 나와서 진짜 공산주의자가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두 사람이다아 하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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