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 소녀> 저자
쌀쌀한 주말. 홍대입구역도 합정역도 아닌, 상수역에 내렸다. 이상한 모자를 쓰고 가죽치마를 입은 여자애들이 지나간다. 아이폰 지도 앱을 켜고 ‘무대륙’을 입력한다. 한적한 주택가, 레트로풍의 바바리코트를 입은 여자가 투명 비닐 봉투를 들고 골목을 돌아 나온다. 이쪽이 맞나 보다 생각하며 모퉁이를 도는 순간, 오 마이 갓. 지하와 구석구석을 모두 활용한 복합문화공간 무대륙의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계산 공간은 아예 건물 밖에 있었고, 줄이 넘쳐흘러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스키니진에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애들이 “야, 이거 봤냐?”라며 서로에게 책을 권하는 훈훈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카톡방에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대한민국 힙스터 여기 다 있네요!”
알라딘 독립·인디잡지 분야 1위를 늘 유지하는 문화비평 잡지 <도미노>, 사표를 내고 퇴직금으로 만든다는 절망북스 출판사의 <비정기간행물 사표>. 언론고시를 준비하다가 너무나 잉여로워 만들기 시작했다는 <월간 잉여>는 어느새 14호까지 나왔다.
그림을 그리거나 팬시를 파는 이들보다도 그야말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독립출판물들이 넘쳐났다. 정말이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책이 있었다. 묻는 이들도 판매자들도 구매자들도 2030세대였다.
생각해보면 이 세대는 피시통신을 경험했고, 각종 문화 잡지와 무크지를 보고 자랐고, 심지어 코믹·아카 등의 만화 행사에서 팬시나 동인지를 만들어 팔았다. 논술로 성장한 대중 출판의 시대에 책을 쉽게 접했고, 영화와 음악과 게임이 그 자체로 소비되었다. 따라서 이 세대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었고, 글만 잘 쓰면 평론가나 논객이 되는 줄 알았고, 먹고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들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외쳤고, 지상 과제는 자아실현이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우리가 경험한 시기가 일시적으로 열린 이상한 공간이었음을 깨닫는다. <페이퍼>를 사 모았던 내가 버리지 못하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잡지가 와 이다. 케이티에프(KTF)와 에스케이(SK)가 만든 이 잡지들은 당시 핫한 이슈와 인물을 다뤘고, 실험적인 이미지와 만화들이 가득했다.
힙스터란 비주류 문화를 선호하며 남다른 것을 소비하거나 즐긴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만, 사실은 어떤 전형성을 보여주는 중산층 젊은이들을 말한다. 강남좌파의 홍대 청년 버전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세계적으로 ‘힙스터’란 용어는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으로 주로 쓰인다. 홍대 변두리에서는 ‘프랜차이즈 아닌 맛집’이 계속해서 바뀌며 뜨고 진다면, 메인 스트리트에는 에이치앤엠(H&M) 매장과 각종 플래그십스토어가 문을 열어대는 것과 같다.
홍대 직장인인 나는 힙스터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한다. 와우북 페스티벌과 언리미티트 에디션에서 카드를 긁어대고 홍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힙스터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중산층이 아닌 내가 택할 수 있던 ‘힙스러움’은 고작해야 책, 독립영화, 인디음악, 빈티지 의류, 진보판 행사였을 뿐이다. 그나마 ‘가능한 구별짓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세대가 이런 방식의 문화 생산을 통해서만 ‘존재의 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패기 넘치는 청춘들의 모습’이라고 우쭈쭈해주는 어른들이 있는 한, 나는, 어쩌면 우리는 이 코스프레를 계속할 것 같다. 마침 누군가가 트위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망한 거라면 망한 시대에 맞게 노는 법을 궁리하는 잉여를 보고 싶다. 일단 홍대부터 끊어.’
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 소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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