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식민지 시대의 고난과 6·25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이고, 또 하나는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를 성취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신생국가 중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나라는 사실상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성과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2010년부터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통괄하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의 회원국이 된 것이다. 주요 20개국(G20) 회의의 일원으로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고, 개발도상국들이 너나없이 배워야 할 모범국가로 꼽히는 것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했다는 역사와 업적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세계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더욱 빛나는 건 가장 폐쇄적이고 가난한 나라인 북한과의 상대적 비교 탓도 크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한 번 좋은 평가를 얻었다고 이런 평가가 고정불변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동네에서도 교양 없는 졸부가 멸시의 대상이 되듯이, 국제사회에서도 인류가 피땀 흘려 쌓아올린 상식과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존경을 잃게 되는 건 자명하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반드시 일직선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박근혜 정부의 역행은 자못 우려스럽다. 가장 예민한 계층인 지식인 사회에서 벌써 ‘신권위주의’니 ‘유신의 부활’이니 하는 말이 나돌고 있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박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다채로운 한복 패션과 유창한 외국어, 극진한 대접을 앞세운 ‘화려한 외교 쇼’를 자랑하는 사이, 국내에서는 인류보편적 가치와 기준을 유린하는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부의 정당해산심판 청구다.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사실심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헌법재판소에 그가 속한 정당 해산을 청구한 절차의 성급함도 문제지만, 본질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선거로 체제 변혁을 꾀하겠다는 제3정당을 현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산시키겠다는 우악스런 발상이 더욱 큰 문제다. 더구나 이런 퇴행적 조처에 대한 박 대통령의 결재가 민주주의의 본고장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 이뤄졌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조원 6만명의 전교조에 대해 해직교사 9명을 조합원으로 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실상 해산명령을 내린 것도 국제기준에 미달하는 부끄러운 행위다. 일단 법원이 제동을 걸었으나 ‘조합원 자격은 노조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윗사람의 심기에만 영합하는 치졸한 행정이다.
민주주의는 다른 생각과 다양한 가치의 공존을 전제로 한다.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이견을 최대한 존중해줘야 민주주의가 튼튼해진다. 그것을 잘하도록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바로 언론의 소임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제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해 있다. 통진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 부정은 선진 민주국가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양성과 소수가 억압되고 그동안 쌓아온 국격이 무너지고 있는 이때야말로 언론의 바람직한 역할이 절실하다. 그 출발점은 언론인 각자가 자신을 도구화하는 진영논리와 자사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사실과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보도·논평하는 저널리즘의 기본원칙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오태규 논설위원 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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