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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여론, 조사와 조작 사이 / 한귀영

등록 2013-11-12 19:07수정 2013-11-13 14:29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정부 스스로 밝혔듯이 60%에 이르는 찬성 여론이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보수언론에 의한 조사이다 보니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헌법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헌법학자 대상 조사에서는 상이한 결과가 나타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노컷뉴스의 보도인데,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에 대해 “정당 유지로 결정해야 한다”는 응답이 46.4%로, “정당 해산”이라고 판단한 헌법학자(33.3%)보다 13%포인트 이상 높았다. 법이 궁극에서는 그 사회의 기득권 수호 기능이 있다는 점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헌법학회는 매우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그런데 보수적인 헌법학자들보다 국민 여론이 훨씬 보수적으로 나타나는 이례적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각의 주장처럼 여론조사가 보수언론에 동원된 여론조작이라고 무시해버리면 속이야 편하겠지만 그렇게 보긴 힘들다. 대체로 여론조사의 문제는 결과의 고의적 왜곡이나 조작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평범한 국민들이 상식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이 주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문제다.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자. 정당 해산 심판 청구의 요건, 법적 의미와 파장을 잘 알고 응답한 국민이 얼마나 될까? 국민 여론이 전문가 여론보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사실 전문가조차 제한된 분야의 전문가일 뿐, 그 누구도 우리 사회 이슈 전반에 대해 결정을 내릴 만큼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민 여론이 중요한 것은 특정 사안이나 주어진 선택지에 대해서 호불호, 선호, 판단 등을 할 수 있고 이것이 정부나 정당의 정책 결정에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 중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가 가장 일차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 특히 복잡한 사안일수록, 전문성이 요구되는 난해한 사안일수록 대다수의 국민들은 호불호라는 원초적 의견에 기대어 판단한다. 통합진보당 해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국민들은 이 정당이 싫으니까 정당 해산에도 동의하는 것이다.

법은 다른 수단을 통한 해결이 불가능할 때 최후에 꺼내야 하는 방어적 조처다.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한 여론조사는 정당 해산이라는 고도의 법적인 판단의 문제를 호불호라는 국민 여론으로 바꿔치기하고 또 특정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교묘한 여론조작이 아닐까?

정히 여론조사를 활용하고 싶었다면 정당 해산이라는 난해한 법적 조처가 아니라, 해산의 명분이 된 사안들에 대해서 물어볼 일이다. 예컨대 통합진보당의 강령인 진보적 민주주의가 우리 헌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지,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사회라는 주장이 헌법적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면 된다. 우리 헌법의 포용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보여주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런 여론조사는 헌법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에 대한 심판은 선거에서 국민들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법은 최후의 신중한 수단이어야 한다. 결정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여론조사로 대체하는 것, 무책임하다. 이 과정에서 여론조사는 여론조작의 유혹에 시달릴 위험성이 농후하다. 이런 식이라면 정당 해산 심판 청구를 가장 먼저 당했어야 할 정당은 차떼기 등으로 민주적 헌정질서를 유린했던 지금 여당의 전신들이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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