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개인적으로 의원내각제는 우리 정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설사 개헌을 하더라도 대통령 중임제가 맞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련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흔들린다. 대통령제는 이제 수명이 다한 것 아닌가, 대통령제가 우리 정치의 질곡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짐작하는 대로 박근혜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1년차 대통령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대개 그렇듯 대통령들은 선거에 이기고 나면 거칠 게 없다. 그러다가 나중에 정신 좀 차릴 때면 초라한 현실과 맞닥뜨린다. 역대 대통령들이 대부분 그랬다. 그런데 그 증세가 갈수록 심해진다.
대통령의 유체이탈만 해도 그렇다. 뼛속까지 정치인인 사람들이 대통령만 되면 아닌 것처럼 행세한다. 정치는 저잣거리의 미천한 싸움꾼들이 하는 것이고 대통령은 저 위의 선계에서 나 홀로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양한다.
박 대통령이 영국 여왕과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향하는 장면과, 법무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청구가 맞물린 것은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법무부의 무리수는 대통령의 지시 또는 사전 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찌됐든 외양상 대통령은 국위 선양에 여념이 없고 철부지 야당은 기를 쓰고 나라를 망치려 드는 모습이 연출됐다. 대통령 유체이탈의 백미요 클라이맥스다.
박 대통령 집권 8개월 동안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폐해가 더욱 심해졌다. 극도의 유체이탈, 상대를 질리게 하는 고집과 독선, 집요한 반대세력 흔들기, 전방위적인 이념공세 등등 5년 단임제의 말기적 증상이 속출하고 있다. 종신 대통령제를 확립한 박정희 시대가 대통령제의 최고 패악이었다면 지금 그리 접근하고 있다.
그런다고 나라가 과거로 되돌려지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백전노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설치는 정권의 전위들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다. 어느 정권치고 칼 쓴 사람이 평온히 끝난 경우는 별로 없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들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달려가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리기 마련이다.
문제는 대통령 욕만 하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음 대통령이 또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여당이 됐건 야당이 됐건 십중팔구 그리될 가능성이 크다.
이참에 대통령제를 바꾸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어느 대통령도 말년, 퇴임 뒤가 좋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예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에는 예외가 없다. 5년 대통령제의 비극은 역사의 실패고 정치의 실패다.
내각제의 불안정성만 보완한다면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통치가 이젠 우리 현실에 더 맞을 수 있다. 대통령이 외딴 고도에 홀로 떨어져 아랫것들 다루듯 통치하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 사회는 대통령이 혼자 하기에는 너무 다원화돼 있다. 대통령 중임제, 이원집정부제도 고려할 수 있지만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영국 하원에서 총리와 야당 당수가 매주 한 번씩 격한 토론을 벌이며 국정을 논하는 모습이 부럽다. 우리라고 못할 것 없다. 유럽이나 일본은 총리 임기를 보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내각제의 불안정성을 극복했다.
우리 정치문화의 뿌리깊은 파당성 때문에 그래도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도를 바꾼다고 정치풍토가 바뀔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나는 5년 대통령제는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 최소한 내각제를 진지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내각제-다당제-권역별 정당명부제로 이어지는 분권형 정치구조를 좀더 정면으로 고민해야 한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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