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택 논설위원
2001년 3월 한겨레신문사 사장실에 팩스 한장이 날아왔다. ‘1997년 정부기관이 작성한 문서(제목: 한겨레신문 종합분석)를 하나 입수했습니다.’ 반론용 인터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고 발신자는 ‘월간조선 편집장 겸 대표이사 조갑제’였다.
결국 <월간조선>은 ‘한겨레신문은 노동신문 서울지국’이란 자극적 광고와 함께 <한겨레>를 음해하는 안기부 문건을 거의 그대로 실었다. “한겨레가 ‘친북’이니 대공용의점을 내사하고 자금지원을 차단해야 한다”. 실제 문건 작성 즈음 6개월간 정부투자기관 등의 광고 취소가 잇따랐다.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서 안기부가 월간조선에 문건을 건넨 사실이 확인됐고, 한겨레 음해공작의 대가로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은 5500만원, 월간조선은 2000만원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안기부는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후보 낙선공작과 언론탄압 공작을 꾸몄다.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 정부에서도 도청으로 국정원장이 둘이나 옥살이를 했으니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찰’과 ‘공작’으로 존재의미를 찾아온 조직의 대선개입은 필연적 귀결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그 활약이 더 공개적이고 대담해졌다. 취임사에서부터 ‘전사’가 되겠다고 공언했다는 남재준 원장은 4성장군 출신답게 이미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대선개입 사건으로 대통령의 정통성에 금이 가고, 자기 ‘조직’마저 도마 위 생선 신세가 되자 비장해온 정상회담 대화록을 과감하게 공개해버렸다. 이어 수사권 폐지 논란이 제기될 무렵 이번엔 쥐고 있던 ‘이석기 녹취록’까지 풀어버렸다.
그의 작전이 어느 정도 먹혀든 데는 청와대와 여당의 지원 외에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서해평화협력지대 제안을 ‘엔엘엘 포기’ 발언으로 몰아가는 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한테서 엔엘엘 사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당시 김장수 국방장관의 발언으로 사실 이 논란은 끝난 셈이다. 그러나 보수언론과 여당이 합작해 ‘님’ ‘저’ 논란까지 이어가면서, 오히려 불법 가능성이 농후한 대선 당시 김무성 권영세씨 등의 대화록 활용 ‘공작’ 의혹은 이슈에서 밀려났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도 마찬가지다. 대선 개입 사건 기소 뒤 청와대와의 갈등설 속에 “곧 날아간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차에 내밀한 사생활 정보까지 활용한 보도가 나왔으니 국정원이 용의선상에 오른 건 당연한 일.
그런데 최근 <중앙일보>가 칼럼에서 ‘채동욱 찍어내기’ 음모론에 ‘구체적 팩트가 없다’며 한겨레가 그를 감싼다고 비판했다. 한겨레가 아직 음모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진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 팩트’가 없다고 신뢰할 만한 ‘정황’까지 무시하는 건 더 위험하다. 월간조선 사건을 비롯해 언론 공작의 사례는 부지기수고, 이번 사건에서도 ‘찍어내기’ 공작의 정황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불과 수년 전 중앙일보 사주가 등장하는 ‘엑스파일’ 사건을 봐놓고도 그런 문제의식이 희박한 것 같아 아쉽다. 설사 채 총장의 혼외아들이 사실이라 해도, 수사대상인 국정원이 개입해 ‘공작’으로 몰아냈다면 혼외자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검증 차원으로 보도한 나경원 전 의원의 ‘고액 피부과 의혹’을 채 총장의 혼외자 의혹 보도와 비교하는 건 적절치 않다. 공직자의 사생활을 ‘성역화’ 했다는 것도 근거없는 주장이다.
수개월째 거듭되는 대화록 공방에서 보듯이 지금 정국 주도권은 국정원을 앞세운 박근혜 정부가 틀어쥐고 있다. 그러나 권력 깊은 곳에서 이뤄지는 음모도 언젠간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때 권력에 놀아난 ‘공작 언론’의 뒷모습을 보는 건 참담한 일이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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